안녕, 남편. 오늘은 여보가 종종 나한테 물어보는 질문에 답을 해주는 걸로 당신에게 쓰는 첫 편지를 시작하려 해. 당신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가 뭐냐고 종종 물어봤었잖아? 글쎄, 딱히 특별한 이유가 없었고 그냥 자연스럽게 마음이 흘렀다고 생각했는데 곰곰히 우리의 만남을 되짚어 보니까 당신이 해 준 한마디 말이 불현듯 떠오르더라. 아마 당신은 기억도 못할테니까 내가 먼저 얘기해 줘야겠다 생각했지.
우선 재미삼아 우리의 첫만남을 되짚어 볼까? 늦가을의 시내 한복판 카페에서 세상일은 혼자 다 하는 척 노트북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정장을 쫙 빼입은 남자를 발견한 날 말이야. 삐걱거리는 테이블의 높낮이를 맞추기위해 궃이 직원분에게 종이를 빌려서 또 그 종이를 열심히 구겨서 테이블 다리밑에 끼우는 모습을 보면서 참 별난 사람이구나 생각했지. 하늘이 도왔는지 그 날 스터디에는 아무도 제 시간에 오질 않아서 우리 둘이서 초면에 소개팅같은 스터디를 했었잖아. 그 때 한 사람이라도 더 제 시간에 왔었고 우리 둘이 얘기할 시간이 없었더라면 우린 서로를 알아보지 못 했을까? 정말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우연의 우연의 우연적인 일들을 필연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인간의 모호하고 주관적인 끌림때문일지도 몰라. 재수없디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 결벽증스러운 모습이 좋았는지도 모르고. 당신이 입은 캐쥬얼정장에 신경써서 꽂혀있는 행커치프가 귀엽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라.
반복되는 지루한 맞선 자리에 지쳐있던 터라 남자 사람에게 내 얘기를 사심없이 할 수 있어서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어. 결혼정보업체의 소개로 만난 몇몇 남자들의 험담을 하고 이제 나이가 있으니 결혼은 해야 하는데 결혼을 전제로 선자리에 끌려다니는게 너무 스트레스라고 투정거리듯 얘기를 하는데 그 얘기마저도 잘 들어주는 당신이 나는 좋았던 것 같아. 그때나 지금이나 당신은 경청을 잘하는 사람이고 나는 말하는 걸 좋아하니까, 동정어린 눈빛으로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당신이 어른스러워 보였어. 당신을 처음 만난 날 집에 와서 엄마한테 그랬어. 잘생긴 것도 아니고 직업이 뭔지 정확히 잘은 모르지만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이런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다고.
나는 늘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망설였어. 고백을 하기전엔 늘 슬펐지. 빚지는 마음 없이 당당해지고 싶어서 연애의 시작에 앞서 용기내어 나를 알리자. 그게 맞는 거다. 상대가 내가 장애인이라는걸 알고 만나는 것과 모르고 있다가 뒷통수를 맞는 것은 다르다. 그러니까 썸타는 시기에 다소 무겁고 생뚱맞을 수 있겠지만, 얘기해야 한다고 말이야. 당신도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 날 저녁에 나는 가르릉거리는 썸 문자대신에 '나는 장애인이고 당신이 좋으니 선택은 당신이 하라'는 식의 도전적인 문자를 남기고 핸드폰을 던져 두었어.
왜 나의 연애는 늘 시작점에서 을의 위치여야만 하는가. 상대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는 정직해지는것이 도리이겠지만 남녀 사이에 호감을 표시하는 순간에서조차 나는 약자여야한다는 생각이 여느때처럼 나를 괴롭게 했지. 사실 난 지금껏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늘 내 장애를 고백했어. 쉽진 않았지만 그건 내 양심의 문제였어. 입장을 바꿔서 관계가 좀 진전된 후에 사실은 내가 장애가 있노라 고백을 하거나 어쩌다 자연스레 그 사실을 들킨다면 나는 상대방에게 너무 화가 나고 실망할 것 같았거든. 옛 남자친구들도 장애가 있다는 내 고백에 다들 그건 문제될게 없다고 얘기를 해줬어. 난 운이 좋았고 그들도 착한 남자들이었어. 다행이었지.
당신은 다음날 급하게 나를 불러냈어. 중요한 부분은 지금부터야. 나머진 얘긴 기억나지 않지만 그 날 당신이 해 준 말들 중에 한 단어가 주의를 끌었지. '존경'. 존경이라. 허허 그것 참 낯간지럽고 멋진 말이긴 한데 썸타는 남자에게서 듣게 될 줄이야. '네가 이 얘기를 하기까지 얼마나 가슴을 졸이며 고민하고 괴로워했을까, 그 마음이 상대를 위한 배려라는걸 너무 잘 안다, 그래서 존경스럽고 고맙다'고 얘기를 하는 당신을 보면서 나는 눈물이 나는 걸 억지로 참았던 것 같아. 쑥쓰러운 얘기지만 나의 신념을 가치롭게 여기고 그걸 말로 표현해주는 사람을 만나니까 내가 정말 멋진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스티브, 나도 알아. 내가 때때로 멋지다는 걸. 근데 나 스스로 자존감을 셀프부스팅하는것과 상대방이 나를 먼저 알아봐 주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짆아. 그건 참 기분좋은 칭찬. 격려. 위로 그리고 사랑의 표현이었어.
나는 누군가에게 존경스럽노라고 말해본 적이 없어. 세상에 멋진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 그런데 나는 상대방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에 인색한 사람이더라. 추측건데 그건 내가 자신감이 떨어지고 자격지심이 있기 때문일거야. 칭찬을 건네고도 상대방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건강한 마음이 부족하단 뜻이야. 나는 여유있게 마음을 돌보면서 사는 사람이 아니었나봐. 혼자만의 세상에서 콧대높게 온갖 있는 척. 행복한 척, 똑똑한 척은 다 했지만 정작 나를 사랑해주는 일에는 너무도 소홀했어.
내가 존경스럽다고 말하는 당신을 보면서 나는 당신이 세상 누구보다 건강한 사람이라는걸 알았어. 꼬여있지 않고, 솔직하고, 당당한 당신을 보면서 나는 참 감사했지. 스티브 당신을 만나서 말이야. 스티브야! 그 때 나에게 멋지다고, 내가 존경스럽다고 표현해줘서 정말 고마워. 언제고 다시 떠올려도 기분좋고 미소가 새어나오는 말이야. 인생에 그런 힘이 되는 순간들이 필요하잖아. 그런 순간을 새겨준 당신에게 정말 고마워. 나도 살면서 당신에게 더 귀기울이고 당신의 가치를 있는 그대로 멋있게 바라봐주는 성숙한 사람이 될게. 당신을 따라잡으려면 한참 멀었지만 나보다 포용력이 큰 당신은 언제나 나를 응원하고 기다려줄 거라거 믿어.
나도 스티브 당신이 참 존경스럽다.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