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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롱올립 Oct 06. 2021

저시력 체험하기 1 - 버스타기



버스타기의 가장 큰 난관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버스의 번호판을 미리 인식하는 것이다. 나는 버스가 아주 가까이 다가왔을 때에야 비로소 버스번호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다. 버스 번호를 알아보고 탈 준비를 어기적어기적할 때쯤이면 이미 버스는 떠나간 다음이다. 버스 기사님들은 버스 밖 승객이 인도에서 살짝 도로쪽으로 나와 서서 '저 이 버스 타요'라는 신호를 보내길 기다린다. 나처럼 탈 건지 말건지 구분이 안되는 상태로 번호판만 주구장창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그냥 지나쳐 버린다. 사실 아까 전부터 아주 절실하게 버스 번호를 제대로 보려고 누구보다도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기사님은 내 사정을 알 리가 없다. 어떤 기사님은 출발하려다 말고 타이밍이 살짝 늦은 나를 배려해 문을 다시 열어주시기도 한다. 그럴 땐 정말 너무 감사해서 나도 모르게 우렁찬 인사가 절로나온다. 하지만 매몰찬 기사님은 얄짤없이 문을 홱하고 닫아버리거나 아예 정거장에 멈춰 서지 않는 경우도 많다.


안경은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안경은 흐릿한 사물의 경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기능밖엔 하지 못한다. 아주 어렸을 적에는 목걸이가 달린 작은 망원경을 걸고 버스 번호를 봤다. 친구들이 그게 뭐냐고 의야해 했지만 창피함을 배우기 전의 나이였다.  손안에  잡힐 만큼 작은 플라스틱 장난감 망원경이었다. 성능은 진짜 망원경에 비할 것이 못되었지만  시력을 보완해줄 정도는 되었다. 사춘기에 접어들고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기면서 나는 장난감 망원경을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망원경으로 버스 타는 '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은 나이가 된것이다. 아무리 불편해도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걸을  있을 만한 거리는 버스틑 타지 않고 걸어 다녔고 부득이할 경우에는 함께  친구를 구했다. 친구와 함께 있으면 눈치껏 행동을 따라 하면 되니 일이 훨씬 수월했다.


시력이  좋아 버스 번호를 미리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다른 복병도 있다. 햇빛에 취약한 나는 대낮에 선글라스를 끼지 않으면 야외에서 눈을 제대로 뜨고 있기가 힘이 든다. 하필이면  필요한 순간에는 선글라스가 없다. 궁여지책으로 가방을 뒤적거려 종이뭉치라도 발견하면 간이로 햇빛 가리개를 만들어 보지만 태양은 정말 피할 길이 없다. 그러면 사실 버스를 대여섯대 놓치는 것은 일도 아니다. 눈을 오만상 찡그리고 안간힘을 써서 버스 번호를 어찌어찌 알아보고 제대로  버스를 잡아타는 날은 운이 좋다. 사실 버스타기가 너무 어려워서 도중에 그만두고 택시를 잡아탄 적도 많다. 날린 택시비가 너무 아깝지만 하염없이 버스만 기다리다가 지각을할  없으니 나로서도  수가 없다.


똑같은 버스도 종류가 많아서 난감하다. 나는 시내버스를 타야 하는데 멀리서 보면   대형차들이지 저게 시내버스인지 고속관광버스인지 공항버스인지 정체를 분간할  없을 때가 많다. 물론 아주 가까이오면 제대로 구분할  있지만 그럴  민망한 상황이 여럿 생긴다. 시외버스 운전기사님들은 시내버스 정류장의 어떤 여자가 차를 세워달라고 손을 흔들거나 앞으로 나와 버스  준비를 하는 것을 목격한다. 경찰인력을 실은 대형버스 기사는 난데없이 경찰버스에 타겠다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어떤 여자를 보고 흠칫 놀란다. 버스안에 대기하고 있던 무장한 경찰들도 신기한 구경거리를 발견한  창문으로 고개를 바싹 붙인다.  '아뿔싸, 이거시내버스가 아니구나!' 뒤늦게 상황파악을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발짝 뒤로 물러나며 딴청을 피운다. 저기 뒤에 따라오는 택시를 잡아타려던 건데  알지도 못하면서 생사람 잡지 말라는  억울한 표정 연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타야  버스를 한번에 잡아  기억이 없다. 타야  번호의 버스를  세번 간발의 차로 놓치고 나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우여곡절끝에 다음 버스를 타면 가는 내도록 약속에 늦을까 마음이 쪼그라든다. 매번 버스타기에 좌절하다 보니 나도 나름의 전략을 세웠다. 어쩌다 보니 몸으로 체득된 것들이라 효과는 아주 좋은 편이다.   몇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정류장에 들어오는 모든 버스를 탈 것처럼 행동하기

버스 기사님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전략은 거의 백발 백중이다. 정류장에 들어선 버스의 문이 열리면 나는 잽싸게 버스 옆면에 큼지막하게 적힌 버스 번호와 간단한 노선도를 확인한다. 내가  번호의 버스이면 반가운 마음으로 올라타면 되고, 다른 버스이면 버스 기사님께 번호를 잘못 봐서 죄송하다고 간단히 고개를 숙이면 된다. 하지만   이렇게 버스를 고의로 보내버리고 나면 정류장에 같이  있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기 시작한다. 벌써 여러  번호를 잘못 알아보고 매번 고개를 숙이며 머쓱해하는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짐짓 모른 척하고 꿋꿋이  있지만 사실  민망하긴 하다.


 2.  정류장에서 같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도움 받기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데는 간접적인 방법과 직접적인 방법이 있다. 먼저 직접적인 방법은 그냥 솔직하게 부탁을 하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제가 시력이 안좋아서 그런데요 저기 오는 버스가  번인가요?"라고 정중하게 여쭈면 거의 대부분 친절하게 대답해 주신다. 간접적인 방법은 사람들이 버스타는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버스 번호를 자세히 보는 것이다.  사람이 버스를 타느라 차를 정차시키면 잽싸게 눈앞에  버스의 번호를 들여다 본다. 남들은 버스를   나는 번호를 스캔하는 것이다. 정류장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데 왜냐하면 버스 승차 시간이 길어질수록 번호를 스캔하는 시간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법 모두 정류장에  말고  있는 사람이 반드시   이상은 있어야 가능하다. 특히 인적이 드문 곳에서 버스를  때에는 주로 혼자 버스를 기다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전략을  수가 없다.


3. 약속시간에 앞서 시간을 넉넉히 계산하고 움직일 것

버스타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다보니 미리 시간을 넉넉히 잡고 움직이는 편이다. 마음편하게 한시간쯤 미리 나서면 중간에 혹여 버스를 잘못 타더라도 내려서 돌아갈  있는 여유시간이 생긴다. 예상보다 일이 술술 풀려서 도착장소에 너무 일찍  경우에는 커피한잔 홀짝일  있는 시간이 생긴다. 무엇보다도 버스를 기다리면서, 타고가는 도중에 초조해 하지 않을  있어서 좋다. 시간쫓기지 않으먼 이미 버스타기의 스트레스가 절반으로 줄어든다. 나에겐 넉넉한 시간이 있으니  대쯤 실수로 보내버려도 괜찮다. 마음이 여유로우면 세상도 달리 보인다. 하염없이 시계만 들여다보며 발을 동동거리는 대신에 차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도 구경하고 계절따라 바뀌는 나무들도 관찰하고 하늘도 괜히 한번 스윽 올려다 본다. 오늘은 날씨가 어떤지 유행하는 옷차림은 뭔지 남들은 어딜 그리 바쁘게 가는지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쩐지 내가 우주 속에 홀로 고군분투하는 슬픈 여자애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4. 가능하면 지하철을 이용할 것

버스타기에 취약한 나는 지하철을 애용한다. 노선도에 따라 수십, 수백대의 버스 번호를 가려내야 하는 수고를   있으니 너무 편하다. 요즘은 핸드폰 어플이 워낙 좋아서 환승해야하는 구간과 예상 소요시간까지 정확히 알려주니 금상첨화이다. 지하철은 나를 배신하는 일이 거의 없다. 버스의 경우 노선이 바뀌었는데 미리 공지를 확인하지 못해서 불편을 겪었던 적도 있고 교통상황에 따라 도착시간이 들쑥날쑥한 경우가 많다. 나처럼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을 위한 배려도 부족하다. 버스는 민첩하고 정확하게 행동할  있는 정상인들에게 어울리는 교통수단이다. 물론 휠체어타신 분들의 편의를 위한 특수 버스도 있지만 그건 예외의 경우이다. 반면 지하철은 만인을 위해 공평하게 설계되고 운영된다. 장애인을 위한 배려석도 칸칸이 설치되어 있고 거의 대부분의 역사에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도 물리적으로 훨씬 접근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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