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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롱올립 Jan 01. 2020

글쓰기에 대한 단상


  좋은 책을 읽고 좋은 문장을 보면 나도 이렇게 멋진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인다. 일단 쓰기 시작하면 글이 술술 나올 줄 알았는데 막상 앉으니 한없이 막막하다. 도대체 무엇을 써야 한단 말인가. 하루의 일상? 점심 메뉴? 오늘 입은 옷? 동료들과 나눈 이야기? 무엇을 써야 할까. 아무 말이든 써내려 갈 순 없다. 그럼 일기와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명확한 주제를 가진 한편의 에세이를 쓰고 싶다. 일단 읽히기로 작정하고 쓴 글은 넋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을 쓸지 정하지도 않고서 호기롭게 빈 페이지 화면을 들여다 보고 있는 내가 낯설다. 자판을 노려 보며 머리를 굴려 보지만 당장은 뾰족한 수가 없다.


글쓰기에 대한 근본적인 동기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한동안 글쓰는 행위를 잠시 접어두었다.  안에 이야기가 흘러 넘쳐 나올때까지 최대한 많이 읽고 생각하며 기다리기로 했다. 당장   없다면 구태여 노력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때가 되면 글이  안에서 흘러 나올 것이다.  이야기는 어두운 동굴  어딘가에 숨어서 있다가 지루해지면 기지개를 펴고 꿈틀대며 세상 밖으로 기어 나올 것이다. 내가  일은 녀석이  잠에서 깨어날  있도록 등을 조금씩 긁어주는 것이다. 우선 나는 질문하기로 한다.


나는 왜 여기에 앉았는가.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은가.


글쓰는 행위는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 내고자 하는 눈부신 노력이다. 치매환자의 삶을 다룬 <스틸 앨리스>라는 영화에서 병세가 중증으로 접어든 주인공이 연단에 올라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장면이 있다. “나는 고통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중입니다. (I am not suffering, I am struggling.)” 나는 주인공이  눈을 반짝이며 힘을 주어 말하는  대사를 정말 좋아한다.  삶의 태도를 정의해야 한다면 주저없이 위의 대사를 인용할 것이다. 좋은 글도 이와 마찬가지로  살고 싶은 동기가 있어야   있다. 나는 우울하지 않은 , 솔직하고 담백한 , 읽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을 쓰고 싶다. 다시 말해 나는 우울하지 않고, 솔직하고, 담백하고, 따뜻하게 살고 싶다. 글쓰는 행위는  사람의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반영한다.  

  솔직해져야 한다. 일단 활자화되는 것들은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읽힐 것을 작가는 이미 알고 있다.  글이 읽히는 것에 거부감이 없어야 개방적인 글을   있다. 숨기고 은폐하는 태도는 영원히  닿을  없는 마음의 가장자리에서 모호한 말들을 떠들어 대는 것과 같다. 내가 가장    있는 것은 ‘나의 이야기이다. 나만의 솔직한 이야기, 나의 감정, 나의 하루, 나의 생각과 시선 그런 것들은 애써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쉽게   있는 좋은 주제다. 나는 나에게   확신을 가져야 했다. 나의 일상과 감정이 좋은 글감이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 나조차 확신할  없는 이야기는 활자로 옮겨질  없다. 적어도 세상에   사람, 나는  글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 이렇게 멋진 사람이야, 그러니까     읽어 볼래?’하는 식의 나르시즘적 패기가 있어야 독자가 안심을 하고  글을 읽을  있다. 나는 어쩐지 그런 패기가 마음에 든다. 현실의 나는 침묵하고 관조하는 사람이지만 글을 쓰는 나는 용감하고 적극적이며   솔직하기를 바란다.
  
내가 외롭다는 사실도 인정하기로 했다.   외롭다는 것은 존재론적인 고독일수도 있지만, 혼자 있어서 조금 심심하다거나 말할 상대가 필요하다거나, 나는 지금 무료하다는 등의   일상적인 외로움일 수도 있다. 아무튼 글을 쓴다는 것은 머리 속에서,  속에서 부유하는 감정을 붙잡아 독자에게 말을 거는 행위이다. 우리는 외로움을 견딜  없을  타인에게 말을 건다. 아무리 시시콜콜한 얘기라도 일단 먼저 말을 건넨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나의 말을 전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정말 아무 말도 하기 싫을  우리는 그저 입을 닫고 상대의 입모양을 바라볼 뿐이다. 도저히 말을 걸지 않고서는  안에 흐르는 이야기들을 혼자 끌어 안고 살아갈  없을  진정한 대화가 시작된다. 그래서 글을 쓰는 행위는 정말로 용기가 필요하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은 어색하고 두렵다. 외롭다는  들켜도 괜찮을 만큼의 용기가 필요하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용감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용감한만큼   좋은 글을   있다.

자기긍정적이고 포용적이며 개방적인 글쓰기를 위해서는 저마다의 무의식적 심리작용을  들여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적어도   가지의 방어기재를 가지고 있는데, 나의 경우에는 여러 방어기재중 ‘침묵 꼽을  있다. 나는 나를 드러내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생각과 의견을 입밖으로 꺼내어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나는 말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다. 그런데 긴세월을 침묵하다 보니 도저히 말로 이야기를 풀어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머릿속으로  정리해둔 멘트들도 일단 말로 꺼내면 혀가 꼬이고 뇌에 과부하가 걸리는 느낌이다. 그래서 불쑥 이상한 말을 내뱉고 후회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말하기 대신 쓰기를 선택했다. '쓰기' 침묵을 동반하고 여러번의 실수도 용납한다. 한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없지만 글은 여러번 고쳐   있다. 나같은 소심쟁이는 새로고침 기능이 있는 글쓰기가 말하기보다 훨씬 편할  밖에 없다.


자신을 알아차리고 나면 글쓰기는 좀 더 쉬워진다. 나의 장점은 그대로 살리고 단점은 보완하는 식으로 사유하고 표현하면 글은 훨씬 정돈이 되고 명확해진다. 글쓴이는 자기 글에 확신을 갖게 된다. 세상에 단 한 사람, 나를 위로하는 글쓰기만 하더라도 엄청난 성취이다. 독자의 인정을 받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작가는 그저 그가 살고 싶은 세상을 표현할 뿐이다. '나'의 희망, '나'의 사랑, '나'의 소망을 담은 글은 작가의 집 거실에, 서재에, 핸드폰에, 친구들에게 쓰는 연하장속에 있기만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서점 자판대위에 예쁜 조명을 받고 번듯하게 놓여져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우리가 그런 것을 바라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니까 괜찮다. '나'를 알고 쓰는 글은 '나'의 통과를 받았으니 제 1의 독자를 확보한 셈이다. 이렇게 자신감을 얻은 작가는 훨씬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쓰기에 임할 수 있다.


일상의 이야기를 에세이로 쓰면서 정말 신기하게도 전보다 좀 더 마음에 힘이 생겼다. 글을 쓸 때에는 모든 것이 좀 더 편안하고 충만하게 느껴진다. 내 손길을 기다리는 텅 빈 화면과 나의 열 손가락과 그 옆에 높인 한 잔의 차가 만들어내는 시간은 완벽하게 나만의 것이다. 더디게 흐르는 이 시간속에서 나는 은둔하는 방랑객이 되어 기억을 해집고 머리속에 스치는 온갖 풍경을 감상한다. 나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뇌하고 무엇이든 써내려 간다. 나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며 날카롭고 예민한 사람이 된다. 글쓰기는 통해 나는 나를 객관화한다. 글에 숨긴 거짓말은 쉽게 들통나기 때문에 조금의 위선도 과장도 통하지 않는다. 나는 쓸수록 점점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을 닮아간다. 글쓰기는 최고의 해방이지 촤선의 치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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