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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롱올립 Nov 12. 2019

대추가 이렇게 예뻤나


남편을 따라 캠핑을 다니면서 나는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있는 모양 그대로 참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다. 텐트를 치고 각종 잡동사니 짐들을 정리하고 비로소 의자에 앉아 한숨을 돌리면 돌연 불어오는 가을 바람과 그 바람을 맞으면서 곧게 하늘로 뻗고 있는 나무들의 늠름한 모양새, 성난 듯 요동치는 가을 바다와 그 바다 속에서 부서지며 합쳐지고 다시 분해되기를 반복하는 하얀 파도가 보였다. 해가 조금씩 바다 건너로 넘어가면 하늘의 색이 따뜻하게 붉어졌다. 뉘엇뉘엇 지는 해을 배경삼아 주변을 살피다 보면 점차 내 눈이 받아들이는 색의 채도와 명암이 주변 사물의 빛에 익숙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게 아침이나 한 낮의 빛은 너무 밝아서 그 시간대에 무엇인가 ‘본다’는 것은 실제로 그 대상을 응시하고 바라보면서 탐색하는 능동적인 활동이 아니다. 나는 유독 빛의 명암과 채도의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쉽게 눈의 피로감을 느낀다. 대체로 대낮에는 늘 선글라스를 껴야 야외생활을 할 수 있고 실내에서도 밝은 백색의 조명이나 핸드폰, 컴퓨터 모니터가 내뿜는 빛을 견디기 어려워 늘 조명을 최대로 낮춘다. 저녁이 되고 빛의 채도가 떨어지면 보는 행위는 한결 편안해지고 비로소 주변의 사물을 제대로 바라보고 관찰하고 느낀다. 나는 한낮의 햇빛을 쬐며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 대낮에 공원의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이 느끼는 여유를 경험하지 못한다. 이런 탓에 나는 본능적으로 자기방어적이고 야외활동을 싫어하고 환경의 변화를 두려워한다.


내 나이 올해 서른 둘, 이제 연말이니 두달 남짓 후엔 서른 셋이다. 서른 두 해를 살면서 대추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고 하면 그 말을 누가 믿을까? 그러나 사실이다. 나는 여태껏 한번도 제대로 대추 한 알을 본 경험이 없었다. 분명 어렸을 적 기억에 시골에서 대추나무를 보고 누군가가 “저건 대추 나무야!”라고 일러주었지만 나는 그 나무에 달린 잎사귀와 열매의 모양이 보이지 않았다. 뿌옇게 나무의 형상을 하고 서 있는 이름모를 나무에 대추가 열렸겠구나 상상했다. 마침 어느 집 담벼락에 쓰여진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를 같이 읇어보는 활동을 했던 기억도 난다. 친구들은 대추의 생김새를 알고 대추나무의 건강한 생명력을 눈으로 직접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간결하지만 아름다운 시를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눈 앞에 가까이 가져다 주어야 사물이 제대로 보이는 제한적인 시력탓에 그 아름다운 시를 이해할 수도, 느낄 수 도 없었다.

<대추 한 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해질녘에 캠핑장 근처의 순천만습지를 걷다가 남편이 나를 불러 어느 나무의 열매를 보여주며 이게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타원형의 작고 단단한 열매을 손에 쥔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대추잖아.”

“난 실제로 대추를 본 적이 없어. 처음이야 대추를 본 건.”

“진짜?”

“응, 진짜야.”


편안한 저녁 노을 빛에 비로소 가까이 볼 수 있게 된 그 열매를 가만히 보니 그렇게 작을 수가 없었다. 모래사장에 반짝이는 몽돌만큼이나 예쁜 모양새였다. 이 속에 몇 개의 천둥과 바람과 햇살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작은 대추 한 알이 금은보화처럼 귀하게 여겨졌다. 나는 주머니속에 대추 한 알을 넣고서 손끝으로 계속 녀석을 어루만졌다. 야무지게 익은 단단한 껍데기가 유약을 바른듯 매끈했다.

다음 날 아침 설거지를 하면서 남편이 대추에 대해 글을 써 보라고 했다. 늘 무엇인가가 쓰고 싶었으나 막상 글을 쓰려고 하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는 어제 본 대추 한 알에 대한 나의 감상을 글로 써보라는 제안이었다. 어젯밤 술에 취해 장석주 시인의 그 시를 읊고, 시가 얼마나 위대한 것이며 시인은 또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를 남편에게 강의하다시피 말했었다.


“네가 쓸 수 있는 글은 바로 그런거야. 나에겐 그냥 대추는 대추일 뿐인데 너는 시를 떠올리고 눈물을 흘리잖아, 대추 한 알을 보고도. 그걸 글로 쓰면 좋을 것 같은데? 너만 쓸수 있는 글, 아닌가?”

평생을 시각장애인으로 살면서 느끼는 나의 불편함이 한 편의 글이 되고 세상에 대한 감상이 되어 읽히는 상상을 해보았다. 기분 좋고 설레는 일이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나와 비슷한 삶을 사는 시각장애인들을 이해하고 서로의 삶에 공감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늘 무엇인가가 쓰고 싶었던 나의 글쓰기 욕구는 사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지금보다 조금 더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살고 싶은 나의 잠재의식적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내 이야기를 써볼까. 이리 저리 머리굴리지 말고 내가 제일 잘 아는 ‘나’를 이야기해볼까. 이게 말로만 듣던 ‘치유의 글쓰기’일까. 그럼 대추 한 알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기쁨과 같이 나를 발견하는 글쓰기를 해보자. 나라는 사람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모두 써보자. 그 안에 몇 만개의 슬픔과 기쁨까지 모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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