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향출신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는 진한 사투리, 나는 너를 만난 순간에는 경계를 풀었다. 타향살이의 피로감이 스멀스멀 찾아올 무렵이었는데 제법 잘 정착해서 이곳의 새로운 이웃들과 잘 어울리는 너를 보니 덩달아 나도 숨통이 조금 트였다. 아이들을 피아노학원에 밀어놓고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동안 우리는 종종 대화를 나누었는데, 너와 나의 둘째아이들이 보채는 통에 대화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아이들없이 오전에 커피한잔 나누자는 약속을 했고 나는 마음먹은 김에 당장 너를 만나기로 했다. 너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어서 단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눌까 궁금했다. 너는 뭔가 말하고 싶은게 가득한 눈을 하고 있어서 아마 우리가 만나면 너는 이야기를 하고 나는 잘 들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무화과 케익을 크게 한 조각 떼어내어 반찬통에 담았다. 크기가 맞질 않아 케이크의 지붕이 무참히 망가지고 무화과 조각이 생크림사이에 폭 파묻혔다. 너의 집은 단정하고 청결했다. 침착하고 신중한 너의 성격을 닮아 물건들이 모두 제자리에 가지런히 은은한 윤기를 내며 정돈되어 있었다. 초인종 소리가 너무 컸는지 잠들었던 둘째가 깨고 귀여운 고사리 손을 쥐었다 펴면서, 시원한 냉커피 한잔과 무너진 케익을 음미했다. 너는 1년 동안 우울증 약을 먹다가 코로나시기에 자연스레 바깥활동을 자유롭게 활 수 없게 되면서 단약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지금은 상태가 많이 좋아졌고 요즘은 말이 느린 첫째아이의 언어치료를 위해 센터를 다니는 중인데 돈이 꽤 든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도착하기 직전에 어린이집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장난감을 두고 다투다가 첫째 아이가 같은 반 친구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 너는 마음이 다시 심란해졌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첫째아이의 삐걱거림이 너로 인해 생긴 문제는 아닐지 자책을 했다.
나는 너를 위로할 수가 없었다. 육아가 어려운건 나도 마찬가지라서 너에게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입장이 전혀 되질 못했다. 내 자식도 어려운 나는 너의 아이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건 나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 뿐이었다. 나도 작년에 첫째아이의 발달상담을 위해 센터를 방문했고 질환이 있는 건 아닌지 검사를 했으며, 언어와 인지가 조금 느려서 치료를 권유받았던 경험을 나누었다. 둘째 아이도 얼마전 주차장에서 어디서 주워 들은 것이 분명한 욕설 비슷한 단어를 뜻도 모르고 쓰더라는 얘기도 했다. 첫째아이가 하루는 내 속옷을 입고 사진을 찍고 싶어했으며, 언젠가는 아이들이 길바닥에 드러누워서 고집을 부리기에 시야에서 사라질때까지 멀리 떨어져서 아이가 다시 일어나길 기다렸는데 결국은 내가 아이 고집에 졌다는 이야기도 했다. 나는 너의 불안이 혼자만의 감정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가 처음 되어본 부모라는 자리가 때로는 우리 존재를 압도하고 짓누른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 또한 보이지 않는 물길질을 열심히 해대며 깊은 강을 건너가는 중일지 모른다. 너도 나처럼 아직 그 강위에서 헤엄치는 중이라면, 우리는 열심히 이 강을 잘 건너는 법을 터득해야만 할 것이다. 너와 나의 파도가 모양도 크기도 세기도 제각각 다르겠지만 우리는 같이 헤엄치는 중이며 네 옆에는 내가 있고, 우리 옆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오늘의 파도를 건너고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안다면 너는 조금 후련해질까. 할수 있는 일이라곤 이 편지를 네게 전하는것 뿐이라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