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어.

딸 같은 친구에게 전하는 이야기

by 셈프레

오랜만에 J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 친구의 엄마와 내가 동갑이라니 나이로 보면 딸 뻘이지만 지인의 소개로 우연히 알게 되었으니 그냥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다. 나도 그 나이 때에는 그랬겠지만 그녀도 스스로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고 생각하는지라 그 마음을 존중해 주고 싶어서 굳이 "내가 네 엄마뻘인데"따위는 내세우지 않는다. 그저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니 그냥 선배처럼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려고 한다. 그래서 연락이 통 없어도 괜한 오지랖으로 연락하지도 않으며 그저 나보다 더 잘 놀 수 있는 제 또래의 친구들과 잘 지내겠지 한다. 그런데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는 "선생님. 저 죽을 것 같아요" 그런다. 연애 문제다.


사실 나는 그녀의 남자 친구와도 안면이 있고 한동안은 그가 운영하는 맥줏집에 그녀와 함께 자주 들르기도 했었다. 그녀의 남자 친구는 그녀와 15살 차이로 나이나 직업, 자라 온 환경에 있어서 뭐 하나 잘 맞을 것 같지 않은 캐릭터의 소유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없는 것들이 매력으로 다가온 듯, 한동안은 잘 지내다가 또 한동안은 울고 불고 싸우다가 그렇게 누구나 하는 평범한 연애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소원했던 그 시기에 드디어 결별을 하게 된 모양이었다.



연애 이야기라는 게 그렇다.


본인들에게는 세상 중요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 다른 사람들에겐 그저 남 얘기인 것이다. 특히 징징거리면 울고불고하는 모습을 보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세상 모든 연인들이 그저 행복하게만 만나다가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며 쿨하게 헤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마는 세상의 거의 모든 연애는 밑바닥을 보여줘야만 끝이 나더라. 아마도 그녀는 그간의 이야기를 다른 지인들에게 하소연으로 털어놨던 듯하고 그런저런 이야기들이 지겨워졌던 지인들은 더 이상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듯했다. 나도 그녀의 성격을 알만큼은 아니, 적잖이 주변 사람들을 괴롭혔으리라 상상이 갔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서러웠을 것이고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징징거림이 힘들었을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자기 스스로만 모르고 있다는 건 어디서나 통하는 이야기이지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지금 누군가 그녀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고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망설임이나 미련, 애증과 연민, 때로는 사랑인지 아닌지도 모호해진 감정들과 지금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분노인지,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인지 스스로도 헷갈리는 감정과, 정이라고 믿는 건지 우기는 건지도 모를 모호한 정의들. 그저 오늘 이 밤에 혼자라는 게 견딜 수 없는 시간이라는 거. 그 모든 것들이 멀쩡한 그들이 보기엔 다소 한심스럽고 지겹다 해도 그냥 아무런 평가나 판단 없이 바라봐주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건 것이다. 아마 나도 그렇게 내 얘기를 아무런 평가 없이 들어줄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그곳을 그렇게 떠나지 않았어도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든 아무도 날 이해하거나 공감해 주지 않는다고 느껴졌던 시간들이 있었다. 처음 한 두 번은 의리로, 때론 친분으로, 또는 안타까움으로 내 이야기들을 들어주는 친구가 있었지만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내게 혼자라는 걸 절실히 느끼게 하는 뼈 때리는 말들을 늘어놓기 일쑤였고 그 말들이 당시의 내게 얼마나 독한 말들이었는지는 깨닫지도 못한 채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그들은 날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나아진 건 이제 나는 그들이 그럴 수 있다 인정하는 사람이 되었고, 더 이상 그것을 상처로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냥 내 삶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 공유하지 못한 지나가는 행인 1, 2, 3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인정하고 이해한다고 마음으로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니 여전히 난 그들과 소원한 관계이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을 보내며 내가 결심한 건 나는 적어도 누군가에게 끈기 있게 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 시절의 나는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공감을 해주면 좋겠으나 그렇지 못하다 하여도 그저 듣기만 하여도, 그저 옆에 있다고, 언제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다고 얘기해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3대가 덕을 쌓아도 될까 말까 한 소원이었다. 들어주는 사람은 있었으나 어느 순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공감으로 느꼈던 끄덕거림은 그저 자기 방법으로 날 판단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내게 돌아오는 서러움은 배신감에 가까웠으며 그동안 쏟아내었던 연약한 마음들이 그대로 모욕감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누군가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건 그만큼 마음이 성장하지 못하고 어린 탓이리라. 마음이 어른이라는 것이 공감해줄 사람 하나 없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겠지만 왜 그렇게 간절히 누군가의 공감과 동조와 위로와 지지를 필요로 했을까를 생각해보면 여전히 어리고 여렸다는 것 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요 며칠 J에게서 자주 연락이 온다.


하루는 이젠 정말 끊어내고 잘 살 수 있다던가, 톡을 차단했다던가, 지난날이 후회된다던가, 남자들은 다 바람을 피우나요?(헤어진 이유가 남자 친구의 바람이었다)로 시작해 그냥 아는 사람으로라도 지낼까 싶다고 하기도 하고 여전히 그의 차를 끌고 다니고 있고, 여전히 카드를 공유하고 쓰고 있으면서, 그 남자의 새 여친 이야기를 같이 하고, 그녀와 자신을 비교하기도 하고, 현실을 부정했다가, 마음 한구석엔 일시적인 바람이니 돌아올 거라는 기대도 내심 하는 듯한 눈치다. 두 여자 모두 사랑할 수 있다는 막장 드라마 같은 그 남자의 대사도 가끔 진짜로 그래 볼까를 생각하는 것도 같고, 그러면서 "너는 더 이상 내 남친이 아니다"라고 말하는걸 무슨 대단한 결단을 보여준 것인 양 스스로에게 주입시키기도 한다. 그런 얘기들을 듣는 그녀의 주변인들은 "너 참 이해 못 하겠다. 뭐하자는건데?" 내지는 "왜 정리를 못하는데? 뻔한 인간을 왜 못 놓는데?" 등등의 말로 그녀를 다그치면서 기다려 주지 않는다. 급기야 더 이상 못 보겠다며 손절까지 하는 모양이다. 나는 마치 '연애의 참견'이라는 프로그램의 패널이 된 느낌으로 그녀를 바라보게 된다.


세상에는 그저 헤어짐 자체가 어려운 사람이 있다.


누구는 어릴적 어딘가에서 생긴 트라우마나 결핍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그런 특별한 이유가 없더라도 언제 어떻게든 어떤 이유에서건 영향을 받아 성격으로 굳어진 사람들이 있다. 그녀가 그런 사람인것 같다. 그래서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과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는 감정과 행동의 롤러코스터를 타며, 여전히 감정의 극과 극을 위태롭게 다니는 것이다. 어느 순간 헤어짐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의 수순이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 아픔도 언젠가는 기억나지 않을 시간 속으로 사라지기도 하며, 스스로의 바람처럼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되고, 또 그 후에는 새로운 시간과 만남이 있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 그녀는 그저 다른 사람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사람인 것이다.


누구나 나쁜 것은 빨리 잊고 생각한 대로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것이 단지 뒤끝이 있거나 예민하거나, 쿨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만큼 애정을 더 가진 것일 수도 있고, 남들보다 더 진지하게 마음을 다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그 마음을 존중하며 봐주지 않고, 빨리 털어내지 못하는걸 답답해하거나 지겹다고 얘기하는 건 진심어린 조언이라기보다는 더 깊은 상처를 주는건 아닐까?.


J에게 묻는다. 그 모든 게 사랑이었을까?


모든 힘든 이유가 사랑 때문일까? 그 대답은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J스스로도 그 모든 순간순간이 사랑이었는지에 대한 확신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냥 사랑이라고 믿고 싶을 뿐 사랑의 정의를 내린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 진심을 다했다는 건 안다. 그래서 J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다. 네가 이상한 게 아니다. 너 같은 사람도 있다. 헤어짐 자체가 남들보다 더 어려운 사람도 있고 미련이나 연민, 결정 장애가 남들보다 더 많은 사람도 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생각이 바뀌고 숨을 못 쉬게 답답하고 때론 병이 나기도 하고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자고 모든 괴로운 순간순간들이 남들보다 더 오래가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고 쿨하지 못하다고 해서 너의 헤어짐이 존중받지 못할 이유는 없다. 네가 진심을 다한 만큼 그 헤어짐에 대한 슬픔과 애도의 시간이 긴 것뿐이다. 그렇다고 그 시간들을 함께 견뎌주지 못하는 친구나 지인들이 나쁜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는 그저 남의 일일 뿐이고 각자의 소중한 일들이 있으니 그들의 방법으로 너를 바라보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행여 난 왜 이럴까?라는 생각으로 잘못된 관계에 더 의미를 두려고 하지 말고, 그저 한 걸음 밖에서 너의 마음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힘을 키워나가길.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더 단단해지길.


그러다 언제든 누군가에게 얘기하고싶을때,


그때 또 그렇게 친구처럼 연락하길.


적어도 그때까지 난 여기 있을 것 같으니....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