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에 머물던 그 한 달 동안, 대표님이 출장을 오신 적이 있었다. 대표님은 내 적응을 걱정하셨는지, 아드님을 소개해 주셨다.
대표님 아들은 나와 비슷한 또래였다. 과학고, 서울대, 스탠퍼드까지.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수재였다. 대표님은 내 손에 쪽지를 쥐여 주며 말씀하셨다.
“아들놈이 스탠퍼드 테니스 모임에 다니는데, 거기 나가면 친구도 사귀고 좋을 거야. 한번 연락해 보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복잡했다.
‘나는 학생도 아니고, 이미 직장인인데… 게다가 대표님 아들이라니, 괜히 부담스럽잖아.’
어쨌든 대표님과 함께 있을 때 잠깐 인사를 나누긴 했다. 아드님은 밝은 미소로 말했다.
“X요일에 한인 테니스 모임이 있어요. 편하게 와서 같이 치세요.”
문제는… 나는 테니스를 전혀 칠 줄 몰랐다는 거였다.
그날 밤, 나는 그저 예의상 하는 말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뜨니, 아는 사람도, 약속도, 할 일도 아무것도 없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누구라도 만나야겠다.’
결국 나는 테니스 레슨을 등록했다. 공을 제대로 맞히지도 못하는 몸짓이 우스꽝스러웠지만, 그래도 뭔가를 배우고 있다는 게 위안이 됐다.
며칠 뒤, 무작정 스탠퍼드 테니스장으로 향했다.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이라 여기저기 물어물어 한참을 헤매고서야 도착했다.
문 앞에 서니 온몸이 굳어졌다.
‘이거 그냥 인사치레였던 건데… 내가 괜히 민폐인가?’
뻘쭘함이란 단어가 그 순간의 나를 가장 잘 설명했다.
그래도 용기를 냈다. 코트 가장자리에서 벽을 치고 있던 학생들에게 다가갔다.
“혹시… 같이 쳐도 될까요?”
“아, 네. 어디서 오셨어요?”
“저는… 여기 학생은 아니고, 지금 근처에서 주재원으로 일하고 있어요.”
가볍게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마음 한켠은 여전히 불편했다. 마치 멤버십 전용 공간에 비회원이 슬쩍 끼어든 기분이었다.
그때 대표님 아들이 나타나, 환한 얼굴로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이분은 한국에서 오신 주재원이에요. 저희 테니스 모임에 오신 거예요.”
분명 좋은 기회였고, 사람들을 사귈 수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마음을 놓지 못했다. 결국 그날 이후 다시는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대표님 아들은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연락을 주며 모임에 나오라고 권했다. 하지만 나는 번번이 가지 않았다. 일정이 없는데도, 그냥 가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후회가 남는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왔던 내가, 왜 그때는 그러지 못했을까.
아마 그 경험이 나를 바꾼 것 같다. 그 이후로는 새로운 기회와 만남이 찾아오면, 절대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으려 노력하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