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사무실은 시끌벅적하다.
아침부터 듣기 부담스러운 말들이 오간다.
고성이 오가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인 것 같다.
"이 숫자가 이게 맞아? 대표님한테 이렇게 보고할 거야?"
"네 이 숫자는 이게 맞고, 상무님 말씀하시는 건 다음 페이지에 나와있습니다"
"아니야 이거를 이렇게 고치고 저거를 이렇게..."
어제 10시까지 야근하며 만든 숫자를 또 바꾼다.
보고 하나 하기가 이렇게 힘들다. 의사결정자들의 의해 숫자는 다시 돌아가고 엑셀의 수식은 바뀐다.
너무 많이 수식이 물려있으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야 할지 난감할 때도 많다. 엑셀 제작자는 한국인이 이렇게 엑셀을 복잡 다양하게 쓰는 걸 알까? 엑셀을 못 만들었다면 한국의 회사들은 대체 어떻게 이 복잡 다양한 걸 표현했을까? 엑셀을 조금만 공부해보면 제작자의 천재성에 존경을 금치 못하지만 실제로 업무를 하다 보면 엑셀 때문에 열 받는다.
'엑셀,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는지 알아?'
자료를 정신없이 수정하고 또 수정한다. 그들에게는 말 한마디이고 펜 하나로 그린 표 하나일 뿐이지만 실무자에게는 10분이 넘게 걸리는 복잡한 작업이다.
일하는 사람은 적고 시키는 사람은 많은 현실. 그러다가 시간에 쫓겨 이게 정확한 숫자인지 아닌지 확인할 여유도 없이 자료를 뽑는다. 팀장과 상무는 자료를 들고 들어간다.
'안 틀렸겠지? 잘했겠지? 에이 몰라. 검토할 시간도 안 주는데. 틀리면 그냥 죄송하다고 해야겠다 뭐'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속으로 약간 불안하다. 혹시라도 숫자를 잘못 넣어서 욕먹을까 봐. 욕먹으면 억울하니까
팀장과 상무가 보고 들어간 시점이 실무자에게는 잠시 쉬는 타임이다. 일은 많지만 미뤄둔다. 일을 한다고 해서 일이 줄어드는 건 아니니깐.
이번엔 옆 팀에 있는 친한 대리님을 찾아간다. 메신저부터 먼저 날려본다.
"대리님 저 쪽에서 산책 한 번?"
대답이 없다. 뭔가 저 쪽도 비상인가 보다. 찾아가 봐야겠다.
"이 거, 이 거 바꾸고 저 거도 열어봐"
대리님 얼굴이 빨갛다. 스트레스 상황이 분명하다. 열 받았나?
"대리님 바빠요?"
"어.. 방금 폭풍이 지나갔다. 지나간 거겠지?"
"잠깐 올라가서 산책해도 되는 거예요? 제가 음료 살게요!"
과장 쪽 눈치 본다.
"어~어~ 데리고 가서 머리 좀 식히고 와"
다행히 그쪽팀 과장님이랑 친한 사이라 눈 감아주신다.
"왜 그래요 대리님? 뭐 때문에요?"
"아 과장님 성격이 엄청 급해서. 힘들다~"
"와 진짜 나도 방금까지 그러고 왔는데, 어딜 가나 똑같네 똑같어"
"아 진짜 나는 급하게 하면 오히려 일을 망치는 성격이라 진짜 스트레스받네"
"제가 딱 대리님 폭발하기 직전에 왔네요. 진짜 직전에"
"어 어 진짜, 너 때문에 이렇게 올라온 거야"
"그나마 타이밍 좋았네요. 다행이다"
잠깐의 티타임. 하루 일과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오늘도 야근이라 아직 하루 일과의 1/2밖에 안 지났지만 상황은 둘 다 여의치 않은 건 확실하다. 불쌍한 일쟁이들
"대리님 그 사업 준비한다는 거는 어떻게 돼가는 거예요?"
"계속 준비는 하고 있지. 주말에 알아보기도 하고. 근데 진짜 쉽지가 않네"
"직장 다니면서 사업 준비하는 게 사실상 하늘에 별따기니까, 그렇게 알아보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거 아니에요?"
"야 근데 진짜 너도 준비해야 한다. 냉정하게 너 10년 뒤 모습이 너네 팀 과장님이야"
"아 그래서 진짜 저도 브런치에 글도 쓰고 파이썬도 공부하면서 어플도 개발하고 싶은데 아이디어도 있는데 이게 진짜 대리님 말처럼 쉽지 않아요. 당장 돈도 없잖아요"
"청년 창업 지원 이런 거 알아봐"
"에이 그게 말이 쉽지. 돈도 얼마 안 주고 직장인들이 할 수나 있어요?"
"얘가 뭘 모르네. 그거 하면 5천만 원에서 최대 1억까지도 줄 걸? 그리고 직장인들도 되게 많아. 다들 똑같이 생각하거든! 미래가 별로 희망적이지 않으니깐!"
그렇게 어플을 깔았는데, 두둥!
진짜로 1억 원을 지원해준다고 한다.
양식에는 사업계획서 하고 필요한 서류들이 정리돼있다.
"어? 이거 그냥 우리가 맨날 업무 하는 그런 사업계획서네?"
"그렇다니까? 너 업무 하듯이만 이거 제대로 짜면 될 수도 있는 거야"
"와 진짜 이거 되면 바로 때려치우고 본격적으로 창업해보고 싶다"
"근데 뭐 경쟁이 워낙 치열하니깐 아이디어가 좋고 잘 써봐야지 뭐"
티타임을 끝내고 자리에 앉아 세부 사업계획서 내용을 보는데
'어라? 이거 진짜 해볼 만하겠는데?'
익숙한 공무원들의 사업계획서 양식이다. 요약적으로 설명돼있는 사업계획서 요건에는 사실 회사에서 늘 이야기하는 것들이다. 비즈니스 모델, 예상 매출 및 이익, 추정 원가 등등등
'내가 사업한다고 하면 매출, 원가 이런 건 뭐라고 써야 하지? 객관적인 지표가 없는데..?'
회사에서는 매출과 원가가 정해져 있어 그 틀에 맞추면 되지만 내가 생각하는 사업 아이템은 그런 게 없다. 최대한 객관적인 데이터를 모아보더라도 사실 모두 하나의 가정일 뿐.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근데 생각해보면 회사에서 예상 손익 돌리는 것도 다 가정이고 그렇게 안 되는 게 비지 기수 아닌가?'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니 또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안 해봐서, 안 써봐서 이게 빙산인지 빙산의 일각인지도 감을 못 잡는다. 어설프게 3점 슛을 던지면 링에도 닿지 못하는 게 부지기수인데
'내가 지금 패스 같은 어설픈 3점 슛을 날리고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갑자기 행복한 상상을 해본다. 성공 신화를 그려본다.
내가 1억에 당첨되면 사업 어떻게 해보지? 어.. 이렇게 개발자를 써보고 해 봐야겠지? 어 동업자가 있으면 가산점이 있네? 그래도 혼자 하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사무실은 어디서 구해보지?
무슨 개꿈인지... 참 웃기다. 사업 계획서에 필요한 요건조차 꼼꼼히 읽어보지 않았는데 벌써 성공신화라니. 물론 '다들 한 번쯤은 생각하니깐' 하고 면죄부를 준다.
업무에 찌든 직장인들의 로망이 카페 차려서 한가롭게 책 읽는 거라고들 하지 않는가. 망상일 뿐이지만 말이다.
이 공고를 보며 또 이런 소식을 들으며 실천에 옮긴 직장인은 진짜 극소수일 텐데 나도 한 번 도전해볼까? 할 수 있을까? 미래가 없다고만 투덜대지 말고 뭐든 실천해보라는 식상한 명언이 머릿속에 머문다. 주말에 한 번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팀장과 상무가 보고를 마치고 나올 시간이 다돼간다. 곧 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오늘도 어떻게든 버티면 퇴근은 하겠지.
에이 모르겠다, 일단 집에나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