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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등어 Dec 09. 2024

점보 여객기를 만들 결심

슈퍼점보기 탄생기와 게임이론

* 이야기의 시작점은 몇 년 전 작성한 글 <큰 비행기가 돈을 더 잘 벌까?>와 동일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 볼까 합니다.


다시 보는

에어버스와 보잉 이야기


2000년대 중반, 두 항공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유럽의 에어버스사에서 개발한 초대형 여객기 A380, 미국의 보잉사에서 개발한 고효율 여객기 B787이 그 주인공들입니다. 에어버스와 보잉은 여객기 제조시장의 양대산맥으로 미래의 하늘길을 점유하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는 회사들입니다. 보통 경쟁사는 비슷한 시장을 두고 비슷한 성능의 제품을 내놓아 경쟁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이 두 회사가 내놓은 A380과 B787은 비슷하기는커녕 그 개념부터 많이 달랐습니다. 두 회사가 서로 다른 시장을 점유하기로 사이좋게 약속이라도 한 것일까요?


사실 이 두 비행기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두 회사의 사무실에서는 기민한 눈치싸움이 오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겉보기에 다른 이 두 항공기는 두 제조사 사이의 치열한 경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존재가 됩니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이 두 항공기 제조사가 서로 어떤 ‘눈치’를 보았던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끊임없이 경쟁하고 있는 것인지, 공항에 주기된 이 두 항공기를 상상해 보며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에어버스의 A380 (좌), 보잉의 B787 (우)

"나만 만들어야 해"

슈퍼 점보기 딜레마


점보기를 아시나요?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공항에 앉아 창 밖 주기장의 풍경을 보면, 비행기 앞쪽 일부만 2층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모양의 거대한 비행기를 보셨을 겁니다. 독특한 모양에도 불구하고,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끼진 않을 텐데요, 이 비행기가 바로 하늘의 여왕 보잉 747기입니다.

1960년대에 개발되어 지금도 하늘을 누비는 보잉 747은 보잉사에 ‘세상에서 가장 큰 여객기를 제작하는 회사’라는 명예를 안겨주었습니다. 하지만 여객기 제조시장의 후발주자였던 유럽의 에어버스사가 747보다 더 큰, 500명 이상의 승객을 태울 수 있는 초대형 여객기를 개발하겠다 선언합니다. 보잉의 ‘가장 큰 여객기’ 시장독점 체제를 무너뜨리겠다는 에어버스의 선전포고였던 셈입니다. 이에 질세라, 보잉 역시 기존의 747보다 더 큰 항공기를 개발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가며 두 회사 간의 ‘슈퍼점보(Super jumbo)’ 경쟁이 시작됩니다.

점보기의 상징 보잉 B747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여객기를 개발하는 데 투입되는 비용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인데요, 이 때문에 두 회사는 슈퍼점보기를 개발하는 것이 충분히 수익성이 있는 일인 것인지 살펴봐야 했습니다. 하지만 시장분석의 결과는 그렇게 밝지는 않았습니다. 개발에만 15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투입되는 데에 반해, 시장에 판매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항공기 대수가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사업에서 수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 회사가 초대형 여객기 시장을 독점해야만 했습니다. 그 말인 즉, 두 회사가 모두 개발에 참여해 시장이 분할될 것이고, 결국 두 회사 모두 손해를 보게 된다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두 회사 모두 개발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까요? 전체적으로 본다면 그럴지 모르겠지만, 두 회사 각자의 입장에선 최선이 아닐 겁니다. 각 회사 입장에서는 자신의 회사가 시장을 독점하고, 다른 회사가 개발을 안 하면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발자의 딜레마와

내쉬균형


‘죄수의 딜레마’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범을 저지를 두 죄수가 체포되었을 때, 둘 다 시치미를 떼면 가벼운 형량을 받고, 둘 다 자백을 하면 보통의 형량을 받습니다. 하지만 한 명이 자수하고 다른 한 명이 시치미를 떼면 자수한 죄수는 석방되고 시치미를 뗀 죄수의 형벌은 늘어납니다. 이상적으로는 두 죄수 모두 시치미를 떼는 것이 이득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마음을 다르게 먹는 순간 본인이 막대한 손해를 보기 때문에 결국 둘 다 자백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게 됩니다.

죄수의 딜레마

두 죄수 모두 시치미를 떼는 상황은 불안정합니다. 누군가 결정을 바꾸는 순간 한 명이 손해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 둘 다 자백하는 경우는 안정합니다. 둘 다 자백했다면 굳이 갑자기 시치미를 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 개체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살펴보는 학문을 ‘게임이론’이라 하는데요, 게임이론에서는 두 죄수가 자백하는 상황, 즉 두 개체가 최선의 선택을 내리고 안정적인 지점을 ‘내쉬균형 (노란색 강조)’점이라 합니다. 이해관계가 얽힌 두 개체는 내쉬균형에서 합의를 이루게 됩니다. 서로의 최선이 모인 지점이니 선택을 바꿀 이유가 없고, 균형 상태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지요.


에어버스와 보잉의 슈퍼점보기 개발 역시 게임이론으로 분석해 보면 어떨까요?

개발자의 딜레마

이런 게임을 ‘개발자의 딜레마 (Developer’s dilemma)’라고 합니다.  여기서 내쉬균형은 두 개인데요, 두 회사 중 한 회사만 개발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차라리 그냥 둘 다 만들지 않는다면 마음이 편할 텐데,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둘 중 하나’만’ 개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지요. 하지만 경쟁사 모두 양보할 리가 없기 때문에 이 게임은 아무런 진전을 보일 수 없습니다.


이를 깨달은 두 회사는 다른 ‘게임’을 벌이는데요, 바로 ‘협력 개발’입니다. 함께 투자해서 비행기를 개발하고, 함께 팔아서 수익을 양분하자는 것이지요. 이 게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협력 개발 시의 개발자의 딜레마

함께 개발하면 수익을 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게임에서 역시 개발-개발은 내쉬 균형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는 바로 이미 초대형기 시작을 독점하고 있는 보잉사가 ‘다른 생각(배신)’을 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었습니다. 협력개발을 하게 된다면 보잉사 입장에서는 독점하고 있는 초대형기 시장을 내주게 되는 꼴이 됩니다. 설령 수익 양분을 한들, 기존의 747의 영광을 잃는 것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지요. 에어버스도 이 사실을 알았고, 보잉이 말로만 협력한다 하고 개발을 지연시키거나, 별다른 기여를 하지 않는 조별과제 무임승차자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만약 이렇게 될 경우 개발은 혼자 하고 수익만 나누게 될 테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결국, 에어버스는 슈퍼점보를 독자 개발한다고 발표합니다. 슈퍼점보기를 동시에 개발한다면 보잉의 손해가 더 크다고 판단했고, 나아가 ‘나 개발한다!’라고 으름장을 놓으면 보잉이 차마 슈퍼점보 개발에 뛰어들지는 못할 것이라 예상한 것입니다.

(개발 / 개발 포기) 상태는 슈타켈버그 균형이다.

이처럼 한 개체가 자신의 선택을 먼저 공개하는 것 역시 이름이 있는데요, 이런 게임을 슈타켈버그 게임(Stackelberg game)이라고 합니다. 먼저 게임이 뛰어들어 상대방의 선택지에 제한을 두는 것인데요, 위에 표로 보면 에어버스가 개발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상 보잉 입장에선 개발 포기가 나은 선택지가 됩니다.

에어버스의 개발 소식이 알려지자 보잉은 오히려 600인승 여객기 개발을 발표하며 맞불을 놓습니다. 에어버스의 예상과는 다른 행보 같지만, 사실상 이 발표는 일종의 ‘협박’입니다. 독점시장을 포기하기 싫었던 보잉이, 본인의 손해를 감수하면서라도 에어버스에게 손해를 입히겠다는 메시지인 것이죠. 이는 실제로도 압박용 메시지였을 뿐 보잉은 슈퍼점보기의 개발을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슈타켈버그 게임으로 분석한 결과와 일치하는 결론에 이른 것이지요.




둘의 눈치싸움은

현재진행형


이 치열한 눈치싸움의 결과물로 탄생한 슈퍼점보기가 하늘을 나는 호텔, A380입니다. 이렇게 이 싸움은 슈퍼점보기 개발에 성공한 에어버스의 승리인 걸까요? 사실 보잉은 다른 노림수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슈퍼점보기의 수요 자체를 빼앗아올 전략을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점보기가 활약할 수 있는 노선은 대형 공항 사이를 연결하는 다수요-장거리 노선입니다. 이를 허브-투-허브 (hub-to-hub) 노선이라고 하는데요, 장거리 노선인 만큼 기본적으로 연료를 많이 실을 수 있는 대형 항공기만 다닐 수 있었습니다.

허브 공항에 수요가 몰리는 이유는 행선지를 불문하고 장거리 비행을 원하는 모든 승객이 대형기가 있는 허브 공항에 모이기 때문입니다. 멀리 떨어진 지역을 연결하려면 큰 비행기가 이륙해야 하지만, 수요가 작으면 비행기에 공석이 발생하고 수익성이 떨어지니 항로를 만들 수 없습니다. 결국 지역의 모든 저수요-장거리 승객은 모두 허브-투-허브 노선으로 몰리게 됩니다. 대전에서 독일 뮌헨을 가려면 대전-인천공항-프랑크푸르트공항-뮌헨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이처럼 승객들이 대부분 인천이나 프랑크푸르트에 살지 않음에도 한국과 독일의 승객은 대부분 인천공항과 프랑크푸르트공항에 모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보잉은 ‘저수요 장거리’ 노선을 비행하는 비행기 개발을 계획합니다. 즉, 크기가 작아 연료를 얼마 못 싣더라도 멀리 날아가는 비행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수요가 적어도 장거리 노선을 만들어낼 수 있고, 승객들은 자연스럽게 허브 공항 대신 지역 공항에서 행선지 공항까지 바로 날아가게 됩니다. 결국 허브-투-허브 노선의 수요는 더 유연한 포인트-투-포인트 노선으로 옮겨올 것이고, 보잉은 A380이 가져갈 수요를 빼앗아올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적은 연료로도 장거리 비행이 가능하도록 연료효율을 크게 개선해 세상에 내놓은 항공기가 보잉 B787기입니다. 컨셉은 판이하지만 두 항공기의 승객당 연료소비량과 비행거리는 서로 비슷합니다. 즉, 기술적으로는 비슷한 제품인 것입니다.



에어버스가 A380을 개발하는 동안 보잉은 B787을 내놓은 이야기는 초대형 여객기 개발을 위한, 나아가 노선의 수요를 차지하기 위한 두 회사의 치열한 눈치싸움의 역사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둘의 눈치싸움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늘에 비행운을 남기고 있는 중입니다.


** 이 글은 <큰 비행기가 돈을 더 잘 벌까?>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글의 말미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읽어보세요!

https://brunch.co.kr/@fly-fish/32



참고문헌

https://www.strategy-business.com/article/15872

https://aertecsolutions.com/en/2022/03/14/game-theory-applied-to-the-aviation-s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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