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요리
교환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배워가는 무엇일까?
누군가는 문화, 누군가는 대인관계, 누군가는 학업이라 답하겠지만,
난 가장 많이 배우는 것 중 하나는 '요리'라고 생각한다.
돈 없어서 외식은 못하지만,
쪼들린다고 맛있는 거 먹기 싫은 건 아니니까!
지금까지 생활하면서 네덜란드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가장 맛내기 쉬운 레시피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해보고자 한다.
바로 간장 소스
식빵에 잼을 발라 먹든지, 조금 맛있게 먹고 싶으면 고기 덩이를 사서 소금 후추를 뿌려 먹던 날들의 연속이던 중, 문득 불고기가 엄청 먹고 싶어 졌다.
당시 부엌 선반에는 양조간장과 소금, 후추만 있었으나, 그래도 가능할지 누가 아는가, 구글에 불고기 만드는 법을 쳐보았다. 간장 2큰술, 맛술 1큰술, 설탕 1큰술, 파, 마늘, 양파, 후추, 거기에 물을 좀 섞는다고 적혀있다. 나머지는 어떻게든 구해보겠는데 네덜란드에서 맛술을 어디서 구할지 살짝 고민했지만, 어차피 알코올이 필요한 거겠거니 하며 1.8유로짜리 250ml 화이트 와인을 하나 샀다.
돼지고기 칸을 갔으나 더치어를 못 알아듣는 관계로 눈대중으로 고르기로 했다. 네덜란드에는 불고기용 고기를 따로 팔지 않는데다가 불고기에 쓸법하게 생긴 얇은 고기도 팔지 않는다. 기름기가 적고 두툼한 녀석으로 하나 사다가 얇게 썰기로 마음먹고, 적당한 녀석을 하나 골라왔다.
ml단위로 계량할 필요도 없다. 큰 술 단위를 사용하니 간편하기도 하고, 구글신이 말해주는 대로 일단 레시피들을 다 섞어보아서 맛을 보았는데, 흠. 뭔가 짠 듯 하지만 끓이면 맛있어질 것 같기도 하고, 한 그런 소스가 완성되었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어슷썰기(?) 비슷한 기괴한 칼놀림을 구현해보지만 현실적 아웃풋은 그냥 랜덤한 크기의 못생긴 고기 덩어리들.
아무튼, 녀석들을 아까 만든 소스에 넣고 랩을 씌운 후, 재워주었다.
맛있어서 내 뱃속으로 사라지든지, 맛없어서 변기통을 가게 되든지..라고 중얼거렸었는데, 내심 기대는 했던 모양.
양념에 고기를 재운 게 2시 반 정도였다. 4시간 뒤, 그러니까 6시 반쯤 약간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처음이니까 망할 수도 있지라는 마음을 시작하기 전부터 먹고 재운 고기를 냉장고에서 꺼내 깨웠다. 프라이팬이 달아오르고, 양념장을 통째로 부어 넣자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는 내 프로토타입.
끓기 시작한 지 한 2분 정도 지났을까? Hㅏ... 향이 올라온다.. 이 Hㅑang기... 불고기 향이다...!
양파가 물러질 때까지 익혔을까, 조금 졸아든 국물, 간장 색, 양념 색을 입고 익은 고기, 난 드디어 아기다리고기다리던 불고기를 맛볼 수 있었다. 끓이기 전 양념장 맛을 볼 때는 짜고 희한한 맛이었는데, 끓이고 나니 불고기 양념이 되는구나, 신기하게 생각하며 난 오랜만에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었고, 이 것이 나의 간장 소스 요리 1호가 되었다.
사실 이 글은 불고기에 대한 글이 아니다. 불고기를 만드는 데 쓰인 간장 소스 레시피가 사실 대부분의 양념의 기본이 된다는 것이 주제. 이 만능 간장 소스에 조금만 변형을 주면 다른 요리들도 가능하다.
그렇다. 간장소스에서 간장을 1큰술만 넣고 그 대신 고추장을 1큰술 넣어주면, 제육 소스로 변신한다. 대신, 제육 소스는 조금 걸쭉하게 먹는 것이 포인트이니 물을 조금 덜 섞어주어야.
양파를 많이 넣어주면 깔끔한 단 맛이 강해진다. 단, 고기도 중요하지만 양파도 다 익을 수 있게 신경 쓰며 익혀주면 끝. 이제 밥만 지어 가져와서 우적우적 드시라.
생존 요리 레벨의 음식들은 사실 매우 호환이 잘 된다는 점이 특징. 간장 소스에 돼지고기 대신 닭을 넣으면 불고기가 아닌 닭볶음이 된다. 뭔가 당면과 매콤한 청양 고추를 넣으면 안동찜닭이 될 것 같은 비주얼과 맛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닭가슴살로 조리하게 되면 닭곰탕의 맛이 나는 육수가 아주 진하게 나오기 때문에, 양념과 섞여서 꽤 맛있는 맛을 즐길 수 있다.
간장 레시피에 이번에는 미림과 계란을 추가해보자. 네덜란드의 대중 슈퍼인 Jumbo에 가서 구석을 잘 살펴보다 보면 일본에서 온 듯 한 mirim sauce(미림이 영어로도 미림일 줄은 몰랐는데..)를 발견할 수 있다. 2유로가 넘어가지만 그래도 한 번 사 보자.
제육 소스에 고추장을 넣었다면, 이번에는 간장 소스에 미림 1~2큰술 정도를 첨가해보자. 그리고 양파도 얇게, 많이 넣어보자. 미림과 양파가 둘 다 단 맛을 내니 설탕은 조금 줄여도 좋다. 이 상태로 닭다리살을 발라서 넣어 (발라져 있는 걸 사는 게 정신 및 손 건강에 좋다) 닭이 다 익을 때까지 푹 끓인다. 물론, 닭다리살은 냄새가 좀 심하니 우유로 잡내 빼주는 것은 필수로 하고, 닭을 넣기 전 계란을 컵에 풀어 준비해둔다.
다 익었다면 불을 내리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하지도 않은 아주 애매모호한 그 뭐랄까 온도에서 푼 계란을 넓게 부어준다. 끝.
이게 뭐냐고?
오야코동이다.
일본에서 태어난 미림 하나를 넣었을 뿐인데, 일본 요리가 되었다.
콧방귀 뀌지 마시라. 난 그렇게 믿는다.
자, 이제 오야코동 소스(간장소스+미림)에 약간의 생강과 인내를 추가해보자.
시작 전, 마트에 가서 통삼겹 한 덩어리를 산다. 간장 소스에 역시나 미림을 넣어 오야코동을 만드는 듯한 포스를 잠시 풍겨보자. 조림 요리이기 때문에 소스가 더 진해도 좋다. 간장 1술, 미림 1술 정도 더 넣어도 맛있다.
그 후 팬에 올리브 오일을 두른 뒤 강한 불에서 통삼겹을 구워준다. "아니 소중한 돼지고기를 센 불에?"라고 생각하실 분이 계시겠으나 다 구울 것 아니다. 겉면만 그을려주는데, 이렇게 해야 양념이 잘 밴다고 하니, 나는 군말 없이 그대로 했다. 육면체이니 모든 면을 골고루 익혀주기 위해 5번 뒤집어준다.
겉면이 보기 좋게 익혀졌으면 고기님은 잠시 도마 위에서 편히 쉬시게 둔다. 그동안 간장소스를 팬에 넣는다. 소스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이제 인내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아채야 한다. 고기님을 넣고 불을 살짝 줄인 뒤 국물을 고기 위로 끼얹어주며 졸인다. 적어도 20분 정도. Hㅏ.
느리게 조리하는 만큼 고기는 더 부드러워지고, 국물이 졸여지는 만큼 맛은 진해진다. 자취 요리 치고는 상당한 맛이 기다리고 있으니 견뎌보시라. 시험 기간만 아니라면 시간 많은 거 다 안다.
20분의 시간을 견뎌냈는가? 20분 동안 맛있게 즐기시라.
마지막이다. 이제 뭐 다 비슷비슷해서 제목만 보고도 어떻게 만드는 건지 감이 오지는 않는 건지 싶다. 얼마 전 같이 교환 온 친구로부터 감자 두 덩이를 받았다. 요 놈을 어찌 먹을고, 생각하다가 급 생각난 요리가 닭볶음탕. 마침 냉장고에 처리하지 못한 닭다리들이 주무시고 계셨는데, 잘됐다, 실행에 옮겼다.
국물이 있어야 하는 요리이기에 제육 소스의 양을 20% 정도? 늘렸다. 사실 비율 이런 거 안 맞추고 감으로 하긴 했는데, 자신의 감을 믿으시라. 물은 충분히 넣은 상태에서 잡내를 제거한 닭다리를 넣어주었다.
빨-간 물속에 빠져있는 닭다리의 조금 의문이 드는 비주얼 때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긍정적인 마인드로 재료 손질을 시작했다. 우선 처리해야 하는 감자들의 껍질을 벗기고, 마트에서 사는 생강을 조금 준비(정말 그냥 넣어보았다). 집에서 먹던 닭볶음탕을 떠올리며 당근 마늘 양파 등을 준비.
의문의 국물이 끓으며 닭 표면이 허옇게 변하면 재료 투하.
닭과 재료들을 좀 더 넣었어야 했다. 너무 휑한 것이 먹기도 전에 누군가 남겨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맛은 딱 닭볶음탕 맛. 성공적이다.
2016.10.20. 방 부엌.
그럼. 모두 다 잘 먹고 잘 지내시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