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 45일 차 잡담
*주의: 이 글은 서론만 깁니다.
벌써 2년 전, 거의 3년 전 일이 되어간다.
꽤 더운 여름방학 기간이었다. 더위 먹고 침대에 뻗어있던 와중, 오케스트라 활동을 열심히 하던 고등학교 선배가 날 객원으로 초대하겠다며 카톡을 보냈다.
"무슨 곡 해요?"
"나부코 서곡이랑 브루흐 바협, 그리고 드팔!"
'나부코는 사람 이름인가 지명인가. 브루흐? 바흐 사촌인가. 드8? 드9는 아는데.'
그렇다. 당시 셋 다 모르는 음악들이었고, 무작정 그 오케에 출석하면서 나의 드8 추억은 시작됐다.
여름방학 직전학기, 교내 오케스트라에서 드보르작 9번 '신세계로부터'와 드보르작 첼협을 연주했는데... (심지어 서곡도 드보르작 카니발 서곡, 그래서 공연 이름도 dvorak이었다. ) 뭔가 둘 다 내 취향이 아니라서 좀 흥미를 잃었던 기억이 있었다. 물론 어렵기도 했고, 내 실력이 바닥을 훑고 다닌 것이 제일 큰 요인이었겠으나..! 여하튼 재미는 재미이니.
그런데 드8이라니... 드보르작을 또 보다니...
그래도 언제 또 내 주제에 객원이란 이름으로 불려 가보며, 악기를 뚱땅거려볼 수 있는 건 좋은 일이었기에, 선배의 퀘스트를 수락.
첫 출석날, 15분 정도 일찍 출석해서 튜닝을 하고 뚱땅거리고 있을 때였다. 나를 맞이해주었던 분은 총무님이었는데, 나에게 악보를 주며 총무님 왈,
"아 너가 재한이구나. 근데 오늘 첼로 너뿐일 것 같은데, 미안해서 어쩌지."
내 실력이 들통날 확률이 100%에 가까워지는 것을 직감한 난, 불안한 마음에 급히 1악장을 펼쳐보았다. 전 날 들어봤던 드8 음원이 거짓말한 게 아니었다. 첫마디 첫음으로 2분음표 D가 떡하니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날 내 얼굴을 본 사람이 있을까 싶다. 부끄러웠다.
곡의 스타일을 떠나서, 악기의 편성으로만 얘기하자면, 드보르작 8번은 첼로의 소리를 맘껏 자랑할 수 있는 곡이다. 연습 3번째 시간까지는 들어가는 타이밍도 맞추지 못해 버벅거렸으나, 나중에 음원을 열심히 듣고 참여하니, 캬, 첼로에게 이 만큼 주선율을 많이 주는 교향곡도 있을까 싶었다.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것도 아닌, 곡을 끌고 가는 역할 자체를 첼로에 준 것이라 느낌이랄까.
내가 클래식을 잘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곡에 대한 평가는 사실.. 못하겠다고 하는 것도 맞고 곡에 대한 의견이 딱히 없다 해도 맞을 것 같다. 그냥, 내가 즐겁게 연주할 수 있게 해줬다는 이유만으로 맘에 드는 곡. 단순하게도.
1악장, 4악장을 가장 좋아한다.
그중 1악장을 먼저 얘기해보자면, 곡의 시작 자체를 첼로가 하는 것도 엄청 재미진데, 첼로가 부드럽게 스타트를 끊고 나면 다른 악기들이 총총거리며 점점 웅장함을 더해가 즐거운 분위기로 변하게 된다. 크 우리가 분위기를 주도했다는 자신감을 soli-(혼자서) 마구 쌓는다. 수미상관일까, 나중에 "음 그래서 이곡은 이런 곡이었어-"라며 주선율을 다시 연주할 때, 차분해진 가운데 첼로가 또다시 등장하여 처음 스타트를 좀 더 여린 방식으로 다시 연주하는데, 내가 속한 첼로지만 참 소리가 아름답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혼자 할 때는 느낄 수 없는, 여러 대의 첼로가 큰 공간에서 연주할 때만 느낄 수 있는 그런 아름다움이 항상 오케스트라 활동으로 날 끌어들인다.
드팔의 꽃이라 하면 단연 4악장이다. 첼로가 매우 바쁜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힘차고 흥미진진하고 즐겁다. 4악장 역시 시작을 첼로가 끊는다. 악보 반 장 안을 도돌이로 돌고 또 돌면서 변주를 연주하는데 첼로 혼자서 분위기를 조였다가 풀었다가 하면 다른 악기들이 서서히 합류하고 어느새 큰 흐름이 만들어져 있다. 첼로가 빙글빙글 돌아다니며 모든 악기들을 다 데리고 오면 4악장의 하이라이트인 빵빵 터지는 선율을 한 번 연주한다. 그 후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첼로의 잔잔한 주선율 연주가 시작되는데, 아, 이게 맨 뒤에서 두 번째 장 왼쪽 면이다. 그 면 전체가 첼로의 변주 선율들이다. 페이지를 넘겨서 그 면이 보이면, it's cello time! 그 한 면이 다 지나갈 때까지, 오믈렛 만들 때 계란물을 젓가락으로 계속 모아주듯, 첼로가 쉴 새 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오케스트라 악기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닌다.
지휘자 선생님도 "여기는 첼로의 무대에요. 즐겁게 해요."라고 말해주셨던 기억.
그 여름 방학을 드팔과 보내고, 이듬해 봄학기, 난 내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드보르작 8번을 또 연주하게 된다. 선배 학교에서는 4 풀트 아웃이었지만, 이번에는 1 풀트 인에서. 실력 들통은 제대로 났으나, 이 곡에 대한 정이 많이 들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학교 선배의 추천으로,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과 드보르작 8번을 연주하는 파리 교향악단의 공연 티켓을 구매할 수 있었다. 한 발 늦어서 10유로짜리 유스권은 가질 수 없었지만, 그래도 드8이라는 사실에 가볍게 구매. (시바협은 알지도 못함. 심지어 당일날 뭐 듣냐는 말에 멘바협이라고 대답했다. 멍청이.)
그 날에 맞추어 교환 친구들과 3박 4일짜리 짧은 파리 여행 계획을 짰고, 첫날 공연장을 찾았다. 파리의 밤거리에 긴장을 좀 했던 터라, 공연장까지 가는 길에는 별 감흥이 없었으나, 공연장에 들어서니 느껴지는 두근거림.
서곡 없이 진행되었던 지라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을 듣고 서곡 마친 줄 알고 박수를 치는 흑역사를 생성하였다 시바.협. 유튜브나 cd로 듣던 소리가, 정말로 존재하는 소리구나, 라는 걸 느끼며 바이올린 솔리스트의 앵콜까지 즐겁게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휴식 시간 15분을 갖고 난 후, 드팔을 연주할 차례인데, 어째서 연주가 시작하기 전까지는 드팔이라는 감흥이 안 오는 것인지. 날 첫날 당황시켰던 그 망할 2분음표 D 소리를 첼로가 청아하게 내자, 아 내가 드팔 들으러 왔구나 깨달았다. 그 뒤로는 뭐.. 여러 기억들이 떠오르며, 행복했지. 4악장 할 때는 웃음도 나는데, 아, 아는 곡을 들으면 오케스트라 공연도 즐겁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모르는 거 들으면 그렇게 잠이 잘 올 수가 없는데 말이지.
-이래서 사람은 지식의 지평을 늘려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건 몰라도 더 즐겁게 살 수 있다.
-교환 기간 중에 클래식 쪽으로는 베5, 라피협2, 베9, 차5 정도 들어보면 소원이 없겠는데.
-나중에 베를린 필하모니 공연당을 찾으면, 좌석 배치에 대해서도 좀 떠들어봐야겠다.
드팔 덕에 알찼던 교환 중 하루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16.10.9 Paris, France
에서 돌아오는 기차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