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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등어 Oct 18. 2016

첼로 생각

교환 57일 차 잡담


기타의 

정체성 혼란


  왼손의 굳은살이 사라지는 것만큼 허무한 것도 없다. 그리 열심히 연습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연주 한 번 서면 손가락이 딱딱해졌었고, 나름 노력의 증표라도 되는 양 단단한 손가락을 만지작하며 뿌듯했었는데, 나중에는 왼손 손가락의 뻐근함과 쓰라림마저 뿌듯함을 떠오르게 하기도.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그냥 내가 소리를 낼 수 있는 건 꽤 즐거운 일이라서 실력 신경 안 쓰이게 동방에 사람 없을 시간 독방에서 악기를 켜보는 경우가 많았다. 기본기 다 버리고 그냥 내고 싶은 소리 그냥 뚱땅낑땅 내다가 오면 그게 뭐라고 스트레스도 풀리고, 유능한 연주자가 된 양 온갖 똥폼 다 잡아보면 그 나름대로 무언가의 분출구가 되기도 했고.
  악기는 꾸준히 하고 싶어서 마침 학교에 있는 레슨 프로그램을 알아보니 아쉽게도 첼로가 없다. 바이올린과 기타가 있는데.. 뭔가 색다름도 경험하면서 왼손도 좀 아파보고자 기타를 선택했고, 다시 되판다는 생각을 하며 연습용 기타를 구매했다. 해외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악기를 사는 건 위험한 일이라 여겼지만 그냥 손이 심심한 것이 근질근질, 질렀지.

제일 기억나는 14년도 봄공연. 단원들끼리 공연 직전에.

  오늘은 레슨이 있는 날이었고, 레슨 직전 급하게 기타를 꺼내서 코드 연습. 손끝이 아파올 쯤 좀 늘었단 생각을 하며 나름 뿌듯함을 느끼고 집어넣을까 생각하던 차, 무릎에 누워있던 기타를 수직으로 세우고 왼손을 지판에 대니 첼로 생각이 문득 났다. 그리고 피치카토 연주하듯이 현을 튕기며 그냥 머리에 지나가던 오블리비언 첫 몇 마디 운지를 연주했는데, 정확히 첼로 감대로 지판을 집으니 원하는 소리가 딱 나다니, 첼로하는 줄. 마침 썼던 현이 기타 2번 줄인데 요 놈이 b라 첼로 a현하고 한 음 밖에 차이가 안 났던 것.
그래 다 같은 현인데 그럼 그렇지 하며, 기타 잡고 비브라토하고 포지션 이동하고 별 희한한 짓 하며 나름 첼로 연습. 첼로 운지대로 연주하니 첼로가 크긴 크구나, 오랜만에 첼로 폼을 잡으니 어깨도 잘 안 펴지는게 느껴지고, 그렇구나.

상처 투성이. 그래도 14년 째.

  하루 정리하며 생각해보니 오늘 있던 일 중 이 기억이 너무 생생해서 내 방 옷장 옆에 눕혀놓고 온 내 첼로가 너무 생각난다. 성량은 작아도 나름 소리는 깔끔한 내가 아끼는 녀석. 하지만 교환 생활 빨리 지나가는 게 더 아쉬우니 첼로야 미안ㅋ 엉아 곧 감.


p.s. 기타 글인데 기타 사진은 하나도 없다. 다음엔 기타도 껴주는걸로.


2016.10.18
잠 안 오는 밤. 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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