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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Apr 17. 2023

18년 전 견고함을 좋아했던 나는

이글루스가 없어진다고 한다.

2005년 백수가 되면서부터 3~4년간 글을 썼던 곳이다. 좋아하는 것들(소설책 리뷰...... 라고 하고 싶지만 그건 아주 코딱지만큼이고, 대부분은 만화 주인공이나 드라마 주인공에 홀딱 빠져서 생난리와 오두방정과 주접을 글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수준으로 아주 그냥 최선을 다해 떨었다. 그 시절의 언어로는 빠순일지라고나 할까?)에 대한 기록과 함께 가끔은 일기를 쓰곤 했었다. 남는 게 시간뿐인 시절이었기에 뭔가를 참 많이도 적어놨는데 대부분 한없이 유치한 내용들이라 가끔씩 보면 흑역사를 마주하는 기분이다. 참말이지 곱게 봐지지는 않는다. 백수 주제에 전기세 낭비를 참 열심히도 했네. 내가 이러고 살았으니 장수생이었구나. 그냥 그런 생각만 든다.  

내내 잊고 살다가 문득 생각이 나면 한 번씩은 접속해서 아, 내가 그때 이런 걸 좋아했지, 수치스러워하곤추억하곤 하는데 부끄러운 기록들이라 자주 들여다보진 않는다. 본다 해도 모니터 창을 최대한 작게 하여 언제라도 창을 내릴 수 있는 준비를 한 상태에서 살짝 곁눈질로 미간을 잔뜩 좁히고선 입모양을 최대한 가로로 만들어 '으...' 하며 본다. 역시나 좀 수치스러우니까.


만화주인공한테 무슨 고백을 그렇게나 자주 했을까. 고시마선생을 너무 좋아해서 시험에 떨어진 날, 술 (쳐)먹고 엄마한테 등짝 맞은 날, 소개팅에서 폭탄 맞은 날 등엔 어김없이 고시마 선생한테 하소연을 하고 있다.

네가 만화라서 내가 이러고 산다 ㅠㅠ 너는 왜 만화 속에 사느냐 ㅠㅠ 우린 왜 만날 수가 없느냐 ㅠㅠ

지금 보니... 참... 꼴값을 떨고 있다.


어쨌든 나의 흑역사가 담긴 이글루스가 사라진다고 한다. 백업을 걱정하는 글들이 많던데 나는 뭐 꽤나 속이 시원하다. 내 손으로 없애긴 뭐 했지만 저절로 사라진다면야.

그렇지만, 그래도 몇 년간의 기록이라 아예 아쉽지 않은 건 아니라서 없어지기 전에 하나하나 클릭해서 보고 있는 중이다. 덕분에 요즘 입모양이 계속 '으' 상태다. 물론 한쪽 눈은 질끈 감고 있다.


오늘 아침에 본 건 아래의 기록이다.


2005년 12월 5일  제목: 견고한 것들이 좋아.


요즘 들어 문득 남자라는 존재와 나 사이엔 정신적인 완충지대가 없다는- 과거에는 있었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완벽하게 소멸된 듯한- 생각이 든다. 가끔씩 "아아- 저 단순한 포유류들에게 내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이런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올 때도 있다. 참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발언이겠지만 저런 말이 튀어나오게 되는 순간들이 요즘 들어 참 많다.


가볍게 던져지는 감정들. 쉽게 날아오는 문자 메시지. 시시껄렁한 농담들. 진심을 알 수 없는 눈짓들. 편안함과 예의 없음을 구별하지 못하는 독특한 신경구조.

언젠가부터 나는 그런 것들에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다.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남자애한테서(우리가 '남자'와 '여자'라는 타이틀을 걸고 대면하게 된 사이도 아니다) 빼빼로 데이날, 내가 빼빼로는 받았는지, 자기가 빼빼로를 받았는지 혹은 받지 않았는지 궁금하지도 않으냐, 왜 물어보지 않느냐, 이런 내용의 문자가 왔는데 꽤나 황당했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빼빼로 사정 따위를 내가 궁금해할 리가 없잖아?!


이런 경우 적당히 씹어버리면 "지 주제에 감히? 나를? 지가 뭔데? 굉장히 어이없는걸?"  뭐, 이런 식의 반응일 테고, 그와 반대로 적당히 상대하며 받아주게 되면 내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확신하며 "좋아, 넘어왔군. 오케이. 가는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심한 착각의 늪으로 빠져들고 만다. 문제는 그쪽에서 나를 무척이나 맘에 들어하여 그런 것도 아니라는 거다. 그냥 그런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저 '그냥' 그러는 건 느껴진다.


다가가도 진심도 아니면서 멀어지면 화를 낸다. 도대체 어쩌라고?

이런 식의 행동들은 나를 맥 빠지게 한다.


친구 중에 꼭 밤 12시가 넘어서 술에 취해 전화를 걸어오는 A라는 녀석이 있는데 자기가 아는 여자한테 다 그러는지 나한테만 그러는지 알 수는 없지만, 번번이 쓰잘 떼기 없는 소리를 한다. 가끔씩 옆에서 같이 술을 마시던 A의 일행들이 A의 전화를 뺏어 들고는 "A를 사랑합니까?!"라고 크게 소리칠 때도 있다.(물론, 다들 잔뜩 술 취한 목소리다. 내가 늘 술 취해 다닐 때는 미처 몰랐는데 내가 멀쩡한 상태에서 남들이 술 취해 있는 걸 보니 두 번 다시는 술에 취하지 말아야지 싶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를 늘어놓으며 자기들끼리 낄낄거리기도 한다. 몹시 불쾌했다. 내가 만만하고 쉬워 보이는 건가?! 그 술자리에서 내 얘기가 어떻게 나왔는지 몰라도 밤늦게 걸려온 전화에서 술 취한 남자들이 낄낄거리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건 몹시도 짜증 나는 일이다. 그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밤에 걸려오는 그 친구의 전화는 모조리 피하는 상황까지 되었는데 어느 날 낮에 통화를 하다가 지나가는 말로 농담처럼 물었다.

"근데 말이야, 너 그날 밤에 그거 무슨 소리야? 네 친구들은 덩달아 왜 그러니? 단체로 약이라도 했니?"

 A는 "응? 뭐? 아아~ 그거?" 하더니, 정말이지 별일 아니라는 듯 "술 취해서 하는 소리지. 뭐야? 진심으로 받아들였던 거야? 웃겨~"라고 말하며 도리어 자신이 황당하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나는 눈치가 그리 빠릿한 편은 아니라서 가끔씩 상황에 맞지 않는 소리도 잘하고 분위기 파악을 정반대로 할 때가 있긴 한데, 이런 순간의 유치한 심보는 너무나도 훤히 눈에 보여 한심스러워 죽을 것 같다. 진심을 보인다면 나 역시 진심으로 대할 텐데 결코 진심을 보이지 않는다.

취한 걸 핑계 삼아 미끼 한번 던졌다가 덥석 물리지 않자 나름대로는 상처받은 자존심을 수습하기 위해 "내가 미쳤냐? 너한테 진심으로 그러게? 제정신이 아니니깐 하는 소리지."라는 말들을 늘어놓는다. 그렇지만, 또 며칠 후의 술 취한 밤이면 어김없이 나한테 전화를 걸어온다. 새벽 1시고, 2시고, 전혀 관계없이. (정말 지ㄹ ㅏ ㄹ같아! 에이씨!-_-;;)


한심하다, 한심해. 이러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하다.

진정으로 '한심하다'는 말의 의미를 통감하게 된다.


동화 속의 왕자님을 꿈꾸던 시절에 가졌던 남자에 대한 환상을 진작에 깨졌고 이제는 어른이 돼버린 내가 바라는 건 진정한 소울 메이트인데, 이런 식으로 자꾸만 실망만 늘어가고 "제길, 포유류 따위;;"라는 말이나 중얼거리고 있으니 언젠가 내 눈앞에 나의 인연이 나타나게 되어도 내가 그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뻥! 하고 걷어차버릴까 봐 그게 참 걱정된다.


이 세상 99%의 남자들은 모두 근사하고 멋진 남자들인데 하필 나머지 구제불능인 1%의 남자들만 내 주변에서 우글거리고 있는 건지 몰라도, 가끔씩 보면 일단 건수부터 만들어 여자애들이랑 진도부터 나가고 보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무작정 들이대는 남자들이(참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표현이겠지만, 그들은 마치 발정 난 수캐들 같다. 마음은 전혀 없고 그저 '남성성'만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있는데 그럴 때면 참 우울해진다.

간절히 바라건대, 나도, 제발, 온건한 정신세계를 갖춘 진짜 남자를, 구경이라도 좀 해봤으면 좋겠다.


견고한 것들이 좋다.

단단하게 감싸여 쉽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정성껏 시간을 들여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친밀해졌을 때 마침내 드러난 내면은 진심으로 꽉 차 있었으면 좋겠다.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는 요즘 같은 때에 이런 걸 바라는 나는 역시나 세련되지 못하고 그저 주제넘게 까다롭기만 한 걸까?


아아, 도대체가 말이지, 이 세상의 수많은 연인들의 시작은 과연 어떠했을까? 서로의 시선이 부딪히는 시간은 아주 짧은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을 읽어내는 방법은 뭘까?

정말이지 그 '시작'의 모든 것들이 몹시도 궁금한 요즘이다.



나는 이 글에 등장한 포유류(..;;)들이 누군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벌써 18년 전의 일이니 당연하다. 연애가 신통치 않을 때 무지 약 올라서 적은 글인가 보다. 음, 내가 꽤나 견고한 것들을 좋아했구나(낚시질에 지쳤구나), 생각하며 읽다가 '근데 너는 그때 왜 그랬니?' 싶어서 좀 웃겼다.


저 글 속에 있는 "A를 좋아하십니까?"의 상황은 지금의 남편한테 내가 했던 짓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나 좋아한다는 신호를 많이 줬는데도 남편이 꿈쩍도 안 하길래 너무 짜증 나서 학교 선생님들과 술 마시다가 나는 그대로 뻗어버렸고 내 술주정을 받아주다 지친 선생님들이 남편한테 전화를 걸어 "얘가 너 좋아한다는데?"라고 대신 고백해 줬다.


다음날 너무 쪽팔려서 모른 척하고 싶었는데 18년 전의 나만큼이나 견고한 걸 좋아했던 남편이 그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바람에, "누나, 진짜 기억 안 나?"라고 아주 세세하게 얘기해 주는 바람에, 내 짝사랑이 들통났다.


그렇지만 여기서부터의 전개는 좀 다르다. 한결같이 견고함에 대한 신념이 강했던 나는 다시 제대로 고백했다.

"어 사실, 기억은 안 나지만... 맞아. 나는 너 좋아하는데, 너는?"

남편은 1초 만에 싫다고 했다. 술자리에서 시작된 고백이라 그다지 견고해 보이지 않았나 보다.  

나는 내내 견고함을 어필하며 고백했고, 남편은 내내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니야, 네가 오해하는 거 같은데 나 진심이야. 봐봐, 나 지금 장난 아니라고."

"어, 알고 있는데?! 나도 진심이야. 지금 장난 아니라고. 누나랑은 절대 연애 안 할 거라고."  


어찌나 얄밉던지. 정말로 한 대 패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어서 그냥 계속 따라다녔다. 견고함에 대한 내 신념을 보여줘야지. 만날 때마다 좋아한다고 얘기했고 도대체 언제부터 나랑 사귈 거냐고 물었다.

오늘부터 1일? 내일부터? 그럼, 모레부터? 한 달 후면 돼?

아니, 안 사귈 거면서 내가 나오라고 할 때 왜 꼬박꼬박 나오는 건데?


결국 남편은 결혼을 전제로 한다면 사귀어준다고 했다.

손 잡으면 결혼하냐? 조선시대 사람이야? 시시껄렁하게 생긴 애가 안 어울리게 선비짓을 하네. 흠칫, 했지만 반년이나 따라다닌 세월이 아까워 일단 알겠다고 대답하며 그날부터 1일이 되었다.

그 정도의 견고함을 바랐던 건 아니었지만 여러모로 남편이 나보다 한 수 위였기에 아직까지 함께 살고 있다.   


서로의 시선이 부딪히는 시간은 아주 짧은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을 읽어내는 방법은 뭘까.

18 전의 나는 그걸 몹시 궁금해했는데, 내가 아직도 남편의 마음을 궁금해하는  보니 애당초 그런  없는  같다. 그저 찰나의 어떤 설렘으로 우주의 기운을 싹싹 끌어모아  모든 순간이 내편이길 바라며 꾸역꾸역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는 때가 어떤 이야기의 시작이 아닐까. 문제는, 그러한 서사를 향한 창작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라고, 이제  생각해 보니 그러하다.  이런 생각도 10 후쯤엔 바뀔지도 모르니 그때까지 브런치는 없어지지 않기를. 10 후에  기록들이 흑역사처럼 읽히않기를. 한들한들 거리며 소박하게 바라보는 한가한 봄날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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