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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Apr 06. 2023

시시껄렁함의 필요

잡담에 대한 잡담

아주 가끔씩 글을 쓰는 블로그가 있다.

2014년도부터 스크랩용으로 사용하다가 2021년부터 게시물을 작성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게시한 글을 총 54개 정도. 평균 방문객은 1~2명이다. 작년에 주간일기 챌린지 때문에 잠시 반짝하며 매주 1편 이상 글을 썼는데 챌린지가 끝난 후로 다시 아무것도 쓰지 않고 있다.


요가 수련일지와 제로웨이스트 게시물을 보기 위해 잠시 들렀다가 생각난 김에 내 블로그를 가봤더니 오늘은 무슨 이유인지 방문객이 5명이나 되었다. 평균 방문객이 1명 정도인 곳에 대체 왜? 생각보다 꽤 소심한 사람이라 조금 놀라고 말았다. 뭔가 문제가 되었나?(이전에 실패한 당근라페 때문에 조회수가 폭주한 적이 있어 이런 일에 소심해진다.) 게시물 몇 개를 살펴보다가 어차피 쓰지도 않는 거 그냥 닫아버릴까 싶었다.


오랜만에 블로그 글쓰기 창을 열고 제목부터 쓰기 시작했다.

기록을 위한 기록보다는

제목을 먼저 쓰고 가만히 쳐다보니 좀 맘에 들었다. 좋아 좋아, 하며 본문을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뭔가 제목과는 다른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블로그를 그만둬야겠다 생각하고 접속했다.

쓰임이 다르기에 유지하고 싶었지만 나의 게으름으로 더 이상 이곳을 찾지 않고 있어 닫아야지 생각했다.

블로그 글 쓰기 화면. 결국 삭제된 글이다.


다음 문장의 첫 단어로 '그런데......'를 두드리다가 "응? 뭐야? 안 닫겠다는 소리잖아?" 깨닫고 말았다.

내가 쓰는 글의 대부분이 저런 식이다. 그저 손이 가는 대로 마구 두드리며 쓰인 글이라 항상 이렇게 쓰다가 방향이 틀어진다. '그런데...'까지만 쓰곤 가만히 그 화면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닫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나는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담긴 시시껄렁한 글을 꽤 좋아한다. 한창 주간일기를 열심히 쓸 땐 가지고 다니는 수첩에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들을 메모해 뒀다가 그 주의 온갖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일기에 쏟아내었다. 예쁘고 단정한 그릇에 담아내는 것보단 오래된 잡지책을 그릇 받침대 삼아 냄비채로 먹어야 맛깔난 음식도 있는데 내게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이 그러한 음식의 역할을 하며 삶을 유쾌하게 해주는 것이다. 나의 일상은 대체로 시시한 일들로 채워져 있기에 조금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이 마음에 와닿을 때가 더 많다. 그러한 이야기들에 둘러싸인 채 하루를 보내다가 잠들기 전에 문득 떠올라 피식거리다 보면 꽤나 행복한 하루를 알차게 보낸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니 어디든 그 시시껄렁한 생각들을 풀어낼 곳도 있어야 하겠다. 휘발성이 강한 이야기들이라 그때그때 기록으로 담겨뒀다가 지루한 오후에 꺼내보며 키득거려야 한다. 일기장에 쓰면 될 일이지만 손으로 글씨 쓰는 걸 힘들어하니, 역시 내겐 블로그도 필요하다. 이 글을 누군가가 보다가 아니 여기 있는 글도 꽤나 시시껄렁한데요?라고 말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시시껄렁 좋아합니다. 눼눼.


어쨌든 다시 주간일기를 쓰기로 다짐했기에 블로그는 날려버리지 않기로 했다.

기록에 대한 다짐이 늘 그러했듯 이 또한 그저 다짐으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이번엔 진짜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은 꽤 중요하다. 힘을 뺀 잡담은 언제나 필요하다.


시시껄렁한 글들


+ 어제 학교 친목회 회식이 있었다. 친목회 회장님이 내 옆자리에 앉는 바람에 친목회 총무님도 잠시 내 옆에 있었는데 가끔씩 행정실에 올 때만 봤던 얼굴보다 훨씬 아이돌 같은 얼굴이었다.

음... 근무환경이 조금(사실 많이) 개선된 느낌이 빡! 들었다. 신난다.


+ 복도에서 아이들이 뛰다가 선생님한테 혼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내 아이도 학교에서 저렇게 혼나는 아이일 테다. 저러다가 머쓱을 받아올 테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아이들이 혼나는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꼭 내가 혼나는 기분이 들어 머쓱해졌다. 다음부터 애들 뛰는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 싶으면 내가 먼저 나가서 조용히 시켜야겠다. "애들아, 너네 이러다 선생님한테 혼난다?"라고 말해줘야지.

애들은 저 아줌마 뭐야? 이러면서 쳐다보면 좀 머쓱해지려나? 머쓱타드.

아들이 맨날 맨날 꼬박 꼬빡 받아오는 그 '머쓱'때문에 이 단어에 꽂혔다. 알고 보니 두루두루 활용도가 높은 단어라 글 속에 녹여서 쓰기가 좋다. 고맙다, 아들아. 참내.


+ 시시껄렁함은 중요하다. 생각해 보면 남편한테 반했던 이유가 남편이 츄리링(트레이닝x 츄리링 o, '츄리링'이라는 말에서 오는 특유의 감성이 있다)이 잘 어울려서였다. 남편은 아직도 츄리링이 썩 잘 어울린다. 잘 차려입은 옷도 이쁘지만 시시껄렁한 옷을 입혔을 때도 참 이쁘다.

남편이 시시껄렁해서 좋아했던 것이니 시도 때도 없는 그 시시껄렁함에 짜증내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 어제 벤츠가 내 앞에서 깜빡이도 안 켜고 갑자기 끼어들었다. 진짜로 사고 날 뻔했었다. 너무너무 빡쳤다. 왜 운전하면서 욕하는지 알겠다. 이 쉑...휘... 브레이크 밟지 말고 미친 척하며 액셀 밟아버릴걸. 잠시 생각했지만 내가 너무 손해 보는 일이니 미친 척하지 않길 잘한 거다. 잘 참아내었다.  


+ 다리 찢기를 할 때 요가블록을 사용하니까 뭔가 든든하다. 그 든든함이 너무 과해서 있는 힘껏 골반을 아래로 내렸더니 며칠째 골반과 허벅지 뒤가 아파죽겠지만 그래도 역시 든든하다. 휘청.  


+ 사무실이 조용하다. 결재가 올라오는 것은 없는데 다들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나처럼 어딘가에 글을 쓰거나 채팅 중일테다. 여긴 너무 일이 많은 학교라 직원들이 가끔이라도 그렇게 다른 짓을 하는 건 대환영인데 키보드 소리가 화가 난 듯 너무 크게 울리니 나를 돌아보게 된다. 혹시 내가 점심때 뭐 화나는 말을 했나? 결재 올릴 때 파일 첨부하란 소리는 다음에 할 걸 그랬나? 음... 아무튼, 조심해야겠다. 휴우.


# 사진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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