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호흡이 필요할 때
직장이 멀어서 좋은 점은 출퇴근 시간에 1시간 정도는 혼자 있을 수 있어서다. 운전을 하는 동안은 온전히 혼자라서 눈물이 좀 흘러도 괜찮다. 내가 지금 왜 우는지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니, 울 수도 있는 거지 뭐. 운전하는 내내 우는 것도 아니고 잠깐동안 그냥 불쑥 눈물이 흘러내리는 거다. 그럼 난 조금쯤은 남일 대하듯 '어? 눈물이네?' 하며 나름 시크한 느낌으로 쓰윽 눈물을 닦는다. 그리곤 계속 운전을 한다. 신호등도 봐야 하고 과속방지턱도 넘어야 하고 트럭 눈치도 봐야만 하는, 꽤나 바쁜 출근길이니 마냥 울고만 있을 수 없다.
눈물이 차올라 툭! 하고 흘리다가 못 보던 들꽃이 피어있음을 깨닫고 아, 예뻐라 하다가 갑자기 트럭이 차선을 침범하면 으악! 도 해가며 출근한다.
아, 진짜 너까지 왜 그래. 트럭한테 버럭 화도 낸다. 그러다 보면 주차장에 도착해 있고 차를 대고 사무실로 들어가 안녕하세요, 웃으며 인사한 후 무탈한 얼굴로 하루를 시작한다.
운전할 때 울었던 사람 같진 않게 꽤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그렇지만 또 마냥 즐거운 건 아니고 가끔 깜짝깜짝 놀라긴 한다.
금쪽이를 보면서 늘 생각했다.
아니, 여기 출연하기 전까지 그걸 몰랐단 말이야? 그냥 딱 봐도 알겠구먼. 굳이 전 국민이 다 보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걸 깨닫는 이유가 뭐지?
근데 내가 지금 딱 그러고 있다. 오은영 박사님께서 화면을 보다가 "잠깐만요!"를 외친 듯 문득문득 어깨가 움츠려 드는 것이다. 아이가 그 정도로 힘들었을 거라곤 정말이지 전혀 생각 못 했는데 또 가만히 생각해 보니 조금은 예상했거나 충분히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금쪽이에 출연한 엄마들이 조금쯤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이제부터 금쪽이를 볼 때 엄마들을 비난하지 말아야지, 다짐도 해 본다.
그래도 처음보단 어제가 괜찮았고 어제보단 오늘이 괜찮았다.
아이한테 조금 미안할 정도로 빠르게 괜찮아지고 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내 탓이라서 차라리 다행이다. 나만 변하면 곧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하니 어쩌면 이건 아무 일도 아닌 것도 같다. 난 제법 노력파기 때문에 금방 변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며칠 제주도를 다녀왔다. 부모님과 외삼촌 가족을 모시고 가는 여행이었다. 심신이 고달파 취소하고 싶었지만 두어 달 전부터 계획된 여행이라 취소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과 외삼촌 내외, 사촌동생들, 여동생과 남동생의 가족들, 우리 가족까지 모두 14명이 같이 한 여행이었다. 3대가 함께 모이자 어쩔 수 없는 소란스러움이 있었다. 아이들과 어른들의 요구사항이 모두 달랐고 그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기 힘든 것이었다. 계획 같은 건 애초에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검사보고서에 따르면, 나는 도덕적 판단이나 이성적 근거로 주변의 요구에 대응하다 보니 정서적 소진감이 빠르게 이루어진다고 했다. 내가 종종 기 빨린다고 표현했던 것을 보고서에선 정서적 소진감이라 정의하고 있었다. 이 보고서를 미리 보지 않았다면 제주도 여행에서 나는 기가 쪽쪽 빨린 상태로 너덜거렸겠지만 다행히 제주도 여행 전에 이 보고서를 몇 번이나 정독했었다.
제주도에선 조금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대응했다. 어차피 계획대로 안 될 거, 알게 뭐람. 누구든 챙기겠지. 알아서들 하겠지.
아이는 아이대로 사촌형들과 즐겁게 놀았고, 나는 남편과 대화를 많이 했다.
"나는 사실 살인자도 이해할 수 있어. 세상에 이해 못 할 사람은 없어."라고 말할 정도로 남편은 관대하고 허용적인 사람이었고, 지나치게 넓은 그 허용 범위가 오히려 나에겐 무책임하거나 비도덕적으로 여겨졌다. 남편 입장에선 내가 너무 엄격하고 목표지향적이었으며, 내 입장에선 남편이 너무 무책임하고 목표의식이 없었다. 남편도 나도 집 밖에선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집에서만큼은 달랐다.
3대가 함께한 여행에서 드러난 세대 간의 격차 정도는 우스울 정도로 남편과 나는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우리가 왜 그렇게 싸웠는지 이제야 조금은 알겠어. 이제야 네가 왜 그랬는지 조금은 이해가 돼.
네가 너무 지나치게 낙관적이라 나라도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어.
조금씩 조금씩 좁혀가보자.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가까워져 보자.
사려니숲에서 남편 손을 잡고 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남편을 닮아가고 남편은 나를 닮아가면서 하루씩 하루씩 나아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원이 많다 보니 아주 큰 숙소를 빌렸다.
남편과 내가 썼던 방 앞에 해가 잘 드는 통창이 있어 내 생에 가장 눈부신 요가를 했다.
아이가 배고프다고 나를 불러 20분 만에 끝내야 했지만 제법 긴 날숨과 들숨을 이어갈 수 있었다.
요가 동작 중 사바아사나를 할 때면 눈물이 스며 나오듯 흐를 때가 있는데 그날의 요가는 사바아사나를 하기도 전에 동작 하나하나마다 그러한 눈물이 차올랐다. 사바아사나의 눈물은 어떤 감정에 의한 눈물이라기 보단 뭔가를 다 비워내거나 온전히 채워졌다 싶을 때, 일제히 숨 죽였던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인데(나의 경우는 그렇다.) 그날은 내내 그런 느낌으로 눈가가 젖어들었다.
남편은 방 안에서 잠들어 있었고 아이는 아래층에서 사촌형과 뛰어다니며 웃고 있었다.
그래서, 그 햇살 속에서 조금 행복하게 울었다.
괜찮아진다는 말의 의미를 온몸의 감각을 통해 깨닫고 있다. 길게 이어지는 들숨과 날숨 한 번이 얼마나 감사한지 매 순간 느낀다. 하루 속에 오고 가는 감정들의 파도 사이로 긴 들숨 한 번과 긴 날숨 한 번이 교차하면서 그 일렁임이 조금씩 잦아든다. 꽤 훌륭한 호흡을 이어가며 꽤 괜찮은 하루도 이어간다.
하루씩 지날 때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