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책을 읽을 때다
4월 내내(아니, 봄이 시작될 무렵인 3월부터) 책장 정리를 해야지 생각했는데 계속 미루고 있다가 드디어 지난 주말에 정리를 했다. 책장이 꽉 차서 새로 산 책들을 둘 곳이 없었다. 식탁과 소파 위를 마구 뒹굴고 있었기에 이제야 말로 정리를 할 때구나 싶었다.
작년 봄에 책을 왕창 정리하면서 느꼈는데 책장엔 아직도 내가 안 본 책이 가득했다. 안 본 책들을 다 보기 전까지 책을 사지 말아야지. 새로 나온 책이 궁금하면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고, 어쩔 수 없이 구입한다 해도 다 읽은 책은 중고서점에 팔아서 책장 하나를 넘지 않도록 해야지. 그때 그런 다짐들을 했는데 여전히 책을 다 읽지도 않고 사모으고만 있어 다시 또 집안 구석구석이 책이었다.
반쯤 읽고 나면 다 읽어버린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뭘까. 예전에는(이 예전도 실은 아주 아주 까마득한 오래전에 끝나버린 예전이다) 한번 읽고 너무 좋아서 같은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곤 했는데 요즘은(이 요즘도 실은 아주 아주 까마득하게 오래전부터 시작된 요즘이다) 한 번을 다 읽는 것이 너무 지루하다. 더 이상 드라마를 보지 않게 된 것처럼 가만히 앉아 책을 읽는 시간 자체도 많이 줄어든 거 같다. 아니 그럼 대체 그 시간들은 어디로 간 거지? 내가 책을 보고 드라마를 보고 일기를 쓰곤 했던 그 시간들이 다 어디로 간 거야? 그때나 지금이나 하루는 24시간일 텐데 내 하루들의 행방이 묘연하다. 가만히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네. 흠...
암튼 또 한 번 책정리를 해야 했기에 책을 하나하나 꺼내 들었다.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책, 이미 읽었지만 두고두고 계속 볼 책, 아직 안 본 책, 아직 안 봤지만 영원히 안 볼 것 같은 책, 이런 기준으로 책을 분류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과 닉혼비의 책 몇 권을 더 이상 보지 않을 책더미 위로 쌓는 순간 기분이 묘했다. 안녕을 인정하지 못 한 채 미련스럽게 붙들고 있던 옛 연인의 사진을 버리는 기분이었다. 질척거리는 마음을 단호히 접으며 이제야 안녕을 고하노라, 하며 책더미 위로 그 책들을 쌓아 올리자 꽤 성숙해진 느낌마저 들었다.
사실 꾸역꾸역 못 본 척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지나가다가 1Q84 저 책은 보는 거냐고 물어왔다. 더 이상은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건 아가씨 때부터 아끼던 책이야."라는 말과 함께 좁아터진 신혼집으로 저 책들을 이고 지고 왔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펼쳐본 적이 없다는 것을.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은 한결같이 무라카미 하루키와 닉혼비였다.
이제와 하는 말인데 난 사실 1Q84를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뭔 소리야? 하면서도 끝까지 읽었다. 그저 글자를 읽는 행위였지만 그래도 그땐 2번씩 읽었던 책이다. 2번을 넘게 읽었지만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1Q84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속의 세계관과 여러 가지 상징들이 내게는 와닿지 않았다. 단편 소설 정도만 이해했고 그 단편 소설에 대한 이상한 애정으로 장편 소설들을 꾸역꾸역 읽어대며 사 모았던 거 같다. 이해하지 못했는데 좋아했던 건 뭘까. 다소 우스꽝스럽고 미련한 애정이었다.
사실 취향은 닉혼비에 훨씬 가까웠다. 특히 피버피치는 정말이지 너무 사랑했다. 그 책은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어쩌면 이렇게 천연덕스럽고 유머 가득한 글을 쓸까. 그럼에도 가볍지 않을까.
닉혼비를 좋아하는데 취향은 무라카미하루키인 척했던 나의 20~30대를 정리했다. 나한테는 조금 이상한 허세가 있었구나, 했다. 더 이상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사진 않을 것 같다. 그러한 허세에서 약간은 자유로워졌다. 아예 떨쳐낼 순 없겠지만 조금씩 조금씩 덜어내고 있다.
자유론, 떨림과 울림
여행하는 인간, 요가 다녀왔습니다,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심플하게 산다 1,2
프랑스 중위의 여자, 앵무새 죽이기, 당신 인생의 이야기, 디어라이프, 그 겨울의 일주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3, 안나카레니나 1~3, 생의 한가운데, 수레바퀴 아래서, 농담
밝은밤, 사랑의 이해, 달을 먹다
아직 읽지 못 한 책들이다. 저 책을 다 읽기 전까지 새로운 책은 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기필코 지켜야지 다짐하지만, 내가 과연 자유론을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싶긴 하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너무 두꺼워서 손이 가지 않았기에 다시는 읽지 않을 책으로 분류하려다가 뭔가 사연 있어 보이는 제목 때문에 간신히 살아남았다. 읽을 수 있겠지? 음......
호텔 마다가스카르, 지구반대편을 여행하는 법
인간실격, 실버라이닝플레이북, 냉정과 열정사이, 키친,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피버피치
이 책들은 읽었지만 또 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따로 챙겨둔 책들이다. 예전에(앞에서 말했듯이 아주 아주 까마득한 오래전에 이미 끝나버린, 바로 그 예전에) 정말로 좋아했던 책들이다. 피버피치는 책을 읽으며 마셨던 음료 자국들이 여기저기 묻어있을 정도로 이곳저곳 들고 다니며 읽곤 했다. 이제는 세세한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아서 그때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그때의 나와 그때의 하루들을 만나고 싶어 다시 읽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요시모토바나나와 에쿠니가오리 책을 읽고 있으면(특히, 에쿠니 가오리) 뭔가 좀... 스스로가 약간... 심은하가 냉장고 광고하던 시절의 분위기를 가진 듯 여겨져 딱히 내 취향이 아닌데도 읽었던 것 같기도 하다. 느낌적인 느낌으로 그런 종류의 허세가 감지되는데 일단 다시 읽어봐야 알 수 있을 듯하다.
기왕이면 에릭사티 음악을 BGM으로 깔아놓고 본격적으로 분위기 잡으며 읽어볼까 한다. 욕조가 없어 반신욕을 못하니 아쉽지만 아쉬운 마음은 붉은 와인으로 달래 봐야지.....라고 쓰고 있는 꼴을 보니 다시 읽어보지 않아도 확실히 허세인 거 같다.
어쨌든 책장을 정리하며, 슬슬 다시 책을 읽을 때가 왔나 보구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