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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May 19. 2023

이토록 시시한 껄렁함

지난주는 교육이 있어 일주일 내내 출근하지 않았다.

업무 관련 교육이긴 했지만 주 업무에서 살짝 비켜선 내용이라 그저 가볍게 시간을 때우면 되었다.

첫날엔 분위기를 알지 못해 조금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지만 주변을 살펴보니 다들 졸고 있거나 열심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길래 둘째 날부터 나도 본격적으로 다른 짓을 했다. 학교 다닐 때 교과서를 펼쳐놓고 책상 아래서 엉뚱한 꿍꿍이를 꾸미던 기분이었다. 그때와는 다르게 엄청 지루했고 조금 신났다. 학생 때는 엄청 신났고 조금 지루했던 것 같은데 역시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구나 했다.


둘째 날에 충동적으로 보라카이 숙소를 예약해 버렸다.

책상 위엔 교재를 펼쳐두고 그 아래에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깔아 둔 채 읽고 있다가 갑자기 심통이 난 것이다. 김연수 작가의 '7번 국도'를 정말 좋아한다. 전화를 걸어 "아직은 여름 하늘이어서"라고 말하던 그 장면을 꼭꼭 접어 맘 속에 품고 살던 때가 있었다. 이 문장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몸서리치게 좋아서 거의 울었다. 7번 국도에 두고 온 청춘들이 여전히 여름 하늘엔 가득한 것 같아서 여름만 되면 "아직은 여름 하늘이어서"라고 중얼거리며 대책 없이 설레곤 했었다. 그 책을 읽은 후로 작가의 책은 모두 사들여 읽고 있지만 나의 통찰력으론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꽤 많다. 어떤 미술 작품을 보았을 때 아름답고 조화로운 색채를 지녔다는 건 알겠는데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하지 못하여 느껴지는 답답함을 그 작가의 책을 읽으며 느끼곤 한다.

매번 깊어져가는 소외감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다가 이건 어쩐지 좀 짝사랑하는 듯한 기분인데? 싶어 약이 올랐다. 뭘 느껴야 하는 걸까. 정말이지 이해하고 싶은데. 아직은 여름 하늘이라서. 이런 장면을 만들어낸 작가한테 반하지 않을 순 없는데 작가의 감성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 짜증이 난다. 에잇! 결국은 그냥 책을 덮어버리고 만다.

도통 네 마음을 알 수가 없어 너무 짜증이 나는구먼.

짝사랑을 많이 해봐서 아는데 이건 확실하게 짝사랑의 감정이 맞다. 쳇!


학생 땐 교과서 밑에 만화책을 깔아놓고 낄낄거릴 수만 있다면 그저 즐거웠는데 역시 이제는 그러한 때가 아니구나 했다. 어른의 땡땡이란 아니, 중년의 땡땡이란 생각만큼 화끈하지도 못하고 재미도 없구나 하다가 충동적으로 보라카이 숙소를 예약해 버린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결정할 일은 아니었으나 이쯤은 되어야 어른의 땡땡이지 싶었다. 불륜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고작 여행지 숙소 예약인데 얼마나 건전해? 게다가 내돈내산! 생각하니 그제야 조금 재밌고 살짝 멋진 듯했다.  


역시, 어른의 재미란 돈을 좀 써야 하는 거라 어딘지 모르게 시시하고 가성비가 떨어지는 면이 있다.


학생 때부터 시시껄렁한 것들을 좋아했다. 나라는 사람이 워낙 틀에 박힌 사람이라 조금 '노는 애들'이 멋져 보였고, 욕 잘하고 남자 친구 있는 애들이 '언니' 같았고, 공부에 관심 없어도 적당히 성적 나오는 애들이 있어 보였으며, 이어폰을 꽂은 채 츄리링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그렇게나 좋았다. 내가 생각하는 시시껄렁함조차 이토록 평범한 시시껄렁함이라, 아! 맙소사! 으이그, 인간아! 싶지만, 내가 결국 그렇다, 뭐.


어쨌든 땡땡이를 칠 수 있었던 한 주였다. 생각보다 재미난 땡땡이는 못 쳐서 아쉽다. 여전히 김연수는 내게 맘을 열어주지 않았고 보라카이 숙소는 충동적으로 결재해 버려 덤탱이 쓴 건 아닌지 불안하다. 질러버린 숙소 때문에 얼떨결에 따라 지른 항공권은 그냥 그 날짜에 뜨는 비행기를 타야 했기에 가격을 따질 수도 없었다.

시시껄렁한 땡땡이를 치고 싶다는 마음이었는데 그냥 대놓고 호구짓을 해버렸나 싶긴 하다.


난 그저 약간 시시껄렁해지고 싶은 건데? 하며 마지막 날은 찢어진 청치마를 입었다.

이미 마흔을 넘은 나이니 앞이 훅 트인 청치마를 앞으로 몇 번 더 입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그날이 올 때까진 부지런히 입을 생각이다. 저 치마를 입을 때마다 내 나이에 걸맞은 시시껄렁함들을 하나씩 찾아야겠다.

어쨌든 나는 시시껄렁함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다행히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시시껄렁함이란 그리 화끈한 종류의 것은 아닐 테니 딱 그 정도만큼의 시시껄렁함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단, 보라카이에 도착하면  레게머리를 하고  테다. 매일매일 다른 레게머리를  거다. 하루는 뿌까처럼 양쪽으로 땋아 올려 귀여워지고 하루는 반짝이 실이랑 같이 꼬아서 힙해져야지, 다짐해 본다.

마흔을 훌쩍 넘겨 찾아낸 나름의 시시껄렁함이다.

다음번에 또 땡땡이의 기회가 있다면, 김연수 대신 마츠모토 토모의 만화 KISS를 들고 갈까 보다.

역시 땡땡이엔 고시마 선생이다.

시시껄렁해 보이게 각도도 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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