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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사이에 비가 정말로 많이 내렸다. 열어둔 창으로 습하면서도 차가운 비바람이 들이치길래 후다닥 일어나 창을 모두 닫았다. 내내 번개가 쳤고 밤하늘이 일렁이는 바람에 잠을 설쳐야 했다.
7월 중순이 되어 가는데 지금 장마인 것이 맞나?라는 생각을 잠결에 설핏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꿈도 꾸었다. 잠들기 전 아들한테 미열이 있어 계속 이마를 짚어보다 잠들었는데 며칠 전의 새벽처럼 온몸이 불덩이 같이 뜨거웠다. 아, 근데 이거 꿈인데...라는 걸 깨닫고는 다시 잠들었다. 그러다 알람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났고 일어나자마자 아들의 이마를 확인해 보니 말짱했다. 꿈이 맞았네,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면 늘 찌뿌둥하고 끈적인다. 밤사이 펼쳐진 다른 세상에 다녀오기라도 한 것처럼 생경하면서도 낯설지 않은 이상한 잔상과 피로에 시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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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읽었던 '국경시장'이라는 책은 좀 힘들었다. 나의 사고가 점점 유연함과는 멀어지고 있으며 이미 많이 닫혀버려 그럴 테지만 읽는 내내 아주 많이 불편했다. 간혹 상상하기 힘든 이미지들과 마주할 때가 있다. 상상이라는 행위 그 자체가 힘든 것이 아니라 상상을 통한 결과물이 힘든 것이다. 둥둥 떠다니는 이미지와 미끌거리는 촉감들이 힘들었다. 책을 읽는 내내 습하고 어두운 굴에 갇혀 있는 듯해서 소름이 돋았다. 중간중간 속이 매스꺼운 느낌마저 들었는데 그 정도면 그냥 책 읽기를 멈춰야 했겠지만 그 당시 참여하고 있던 독서모임의 선정도서라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다.
소감을 발표하면서 나도 모르게 '이 책을 선정한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모임이 끝나고 나면 중고서점에 바로 팔아버릴 것 같다. 아주 힘들게 읽었다.'라는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 모임이 끝나자마자 정말로 그 책은 알라딘에 팔아버렸고 그 후 싹 잊고 있었는데 요즘 들어 부쩍 생각이 난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 책의 내용들이 마치 지난밤의 일처럼 떠오르는 것이다. 잠시 서서 멈춘 채로 장마가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비가 너무 많이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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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에 비가 정말 많이 내렸다. 와이퍼가 역대급으로 바쁘게 움직이며 우다다다 했는데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기름이 없다며 노란등이 켜져 마음이 초조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20킬로는 넘게 남았는데... 멈추면 어쩌지? 주유소를 몇 군데 지나치긴 했지만 이렇게 비 오는 날에 차선까지 바꿔가며 주유소에 들어갈 수 있는 운전실력이 아니라 눈뜬장님처럼 그냥 멍하니 지나쳐야 했다.
유리창에 김이 서리기 시작하여 앞이 뿌옇게 되어가는데도 기름이 없는 와중에 에어컨까지 켜면 차가 도로에서 멈춰버릴까봐 쫄보처럼 느릿느릿 운전하느라 지각을 하고 말았다. 언젠가 남편이 노란등이 켜져도 어느 정도까진 괜찮다고 그랬는데 여전히 노란등은 무섭다. 그 '어느 정도'란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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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도착하자마자 학교를 한 바퀴 돌았다. 오늘 새벽부터 문자가 왔었다. 7.12.(수) 04시 기준으로 호우주의보가 발효되었으니 각급 학교는 안전한 등교지도 및 시설물 관리철저 등에 유의하라고 했다. 이런 날이면 안전팀은 밤을 새우겠구나, 코로나가 끝났으니 조금 편하려나 했는데 장마철은 어김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시설물 관리 철저에 만전을 기하고자 학교를 한 바퀴 돌아본다.
돌아본들 내가 뭘 알겠냐만은 옹벽과 배수로 등을 제법 주의 깊게 살펴본다. 실은 그저 멍 때리는 거에 가까운 것으로 살짝 초점이 나간 시선을 하고선 머릿속으로는 우리는 언제까지 '만전을 기하고자'라는 말을 쓰고 있을까 궁금해한다. 최선을 다하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만전을 기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좀 더 '관리 철저'에 가까운 듯 한 이 느낌적인 느낌은 대체 뭘까. 옹벽과 배수로를 멍하니 살피며 그냥 그런 거나 궁금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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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 직후엔 운동장 여기저기에 지렁이들이 꽤 많이 보인다. 꿈틀거리는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문득 오래전 일이 떠오른다.
장마철에 비가 잠시 개인 틈을 타 무겁던 장화를 벗어던지고 기분 좋게 산책을 나갔다가 구렁이만 한 지렁이를 밟아버리고 말았다. 뭔가가 미끄덩거렸다. 그 기묘한 느낌 때문에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발밑에서 몸을 뒤흔들고 있는 생물체를 보곤 너무 놀라서 "어어, 이거 뭐야?" 울먹이는 어린애가 되고 말았다. 이쯤에서, 엄마아! 외치며 커다랗게 울음을 터트려버릴까 생각했던 이유는 그날 엄마랑 싸웠기 때문이었다.
회사를 그만둔 후 한동안은 후임자한테 전화가 자주 왔었다. 제대로 되지 않는 일에 대해 묻기도 했고 힘들다고 칭얼거리기도 하여 "아아 괜찮아" 하며 격려해 주곤 했는데 더 이상 그런 일로는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 때가 온 것이다. 이 거대한 지구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하는 사실이 쓸쓸하여 괜히 엄마한테 짜증을 내고 말았다. 발밑에서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보니 사실은 엄마한테 화낼 일이 아닌데 싶어 미안했다. 지렁이를 밟은 김에 엄마~하고 울어버릴까. 울면 엄마가 나를 좀 봐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을 했었다.
'지구 따위 돌아가든지 말든지' 쿨내 진동하는 척 그런 말들을 중얼거리곤 했는데, 지구야말로 나 따위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서운해하며 지구가 나 때문에 딱 1초라도, 아니 1초가 너무 길다면 0.1초라도, 잠시 좀 멈춰주면 안 되나? 그게 아니면 0.01초라도. 그런 생각을 하며 투덜대었던 날들이 떠올랐다.
장마철이면 그렇게 지구가 나 때문엔 멈추진 않는다는 사실에 쓸쓸해하다가 지렁이를 밟고 울고 싶어 했던 어렸던 날의 내가 떠오른다.
그때, 나를 위해 지구를 멈추게 하지 못했던 엄마는 얼마나 속상했을까. 이제야 그 마음이 조금씩 느껴진다. 왜 이런 것들은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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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은 눅눅하고 딱딱이 복숭아는 싱겁기만 한 장마철이다. 풀벌레 소리가 울리는 여름밤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