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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Jul 15. 2023

어른의 휴일

또 비가 내린다.

계속 비 얘기를 하는 이유는 계속 비가 내리고 있어서다. 지난주도, 이번주도 하루도 빠짐없이(아, 어쩌면 잠시 그쳤던 날이 있을 수도?) 비가 내리고 있어 내 사고의 흐름이 대체로 비와 연결되고 있거나 행동반경이 좁아져 있기 때문이다. 글 소재의 지리멸렬함이 오직 내 창의력의 부족함 때문만은 아니라는 소리다.

집안 공기는 적당히 눅눅했고 비가 와서 밖에 나가 놀지 못한 아들은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으며 거실 티브이는 그 누구도 보지 않고 있지만 그냥 혼자 켜져 있다. 소리를 들어보니 '나는 솔로'가 방영 중인 거 같다.

저 방송을 일부러 챙겨보진 않지만 우연히 보게 되면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앉아 쭉 보게 되는데 볼 때마다 자꾸만 "아이고, 네가 그러니까 계속 솔로지."라는 탄식과 함께 어쭙잖은 충고를 하고 싶어 진다. 라떼는 말이야, 하면서 내가 어떻게 솔로에서 탈출했는지 이야기해 주고 싶다. 근성이 없네, 근성이!! 그래서야 차지할 수 있겠어?라고 혼자 중얼거리고 만다.


 암튼 혼자  그렇게 잔소리를 하게 될까 ...  아니고, 사실  회차 방송은 어제도 재방송해줘 이미 봤던 거라, 식탁에 앉아 책을 보기 시작했다. 비가 오고 있기에 요즘은 휴일에 그저 집에서 책을 보고 있다.  

요즘 나는 3권의 책을 번갈아 가며 보고 있다. 경애의 마음, 일간 이슬아 수필집, 안나 카레니나. 조금 전까지는 이슬아 수필집을 읽고 있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뭔가 떠오르기 시작한 생각을 빨리 남겨야겠다 싶어 책을 덮고 휴대폰을 집어 든 것도, 모두 이 책 때문이다.


나는 이슬아 작가가 2018년 3월 8일에 쓴 글을 읽고 있었다. 그 글의 내용은 이렇다. 이슬아 작가의 어머니께서 작가에게 어마어마한 비밀을 알려주겠다며 집으로 불러들여 알려준 것은 사람의 얼굴 중 동공에서 코끝까지의 거리에 숨겨진 비밀이었다. "남자의 경우 그 길이는~"하더니 풀 발기 했을 때의 고추 둘레와 같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나야 뭐 이미 늦었지만 너한테는 정말 필요한 정보 일 것 같아 알려준다는 모녀 사이의 쿨함은 둘째 치고, 나는 나의 쿨함에 놀라고 있었다.  


거실엔 그 누구도 보지 않는 나는 솔로가 방송되고 있었고, 느지막이 일어난 휴일 오전에 풀발기에 대해 쓰인 글을 보면서도 심드렁한 표정을 유지하며 "정말? 둘레는... 아닐걸?"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내가 좀 '으른' 같이 느껴졌다. 훗, 나 쫌 으른 녀좌 같은데? 우쭐.


또 이글루스 이야기인데, 글이란 걸 써 본 것이 이글루스와 브런치가 전부이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경험치가 짧으니 식상해도 어쩔 수 없다. 암튼 이글루스에 일기를 열심히 쓰던 그 시절. 지금보다 많이 어렸고, '나는 솔로'였으며, 미숙함과 촌스러움에 대한 콤플렉스로 여전히 스스로를 '으른'으로 생각하지 않던 때에, 홀로 자주 염탐(?)하던 동갑내기 블로거가 있었다. 어느 날 그분은 휴일의 일기에 모닝 담배를 피우며 모닝 섹스를 한 이야기를 써 놓았는데, 그때의 충격이란! 어른의 세계란 이런 것이구나. 깜짝 놀랐다. 그분이(나랑 동갑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늘 '분'이셨다) 너무 멋진 으른 녀성 같았고 나도 언젠가는 저런 쿨하고 멋진 으른 녀성이 되어서 모닝 담배... 는 아니지만(담배 냄새는 내 취향이 아니다) 모닝 맥주라도 꿀떡꿀떡 마시며 모닝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다가 허리가 조금 아프구먼, 하는 이야기를 무심한 듯 툭, 던져야지. 이런 종류의 다짐을 진지하게 하곤 했었다.

그 시절엔 여전히 수줍음이 많아서 섹스를 섹스라고 쓰지 못하고 금기어를 대하듯 'ㅅ ㅔ ㄱ ㅅ ㅡ '라고 표기하거나 그저 '잔다'라고 에둘러서 쓰곤 했는데 이제 으른 녀성이 된 나는 쎅쓰라고 포인트까지 줘서 쓸 정도로 성숙해졌다. 대견.

다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먹기엔 아들이 남긴 바나나킥은 조금 적당하지 않다 싶어 지금이라도 으른스러운 유리잔에 맥주를 한 잔 따라 마실까, 생각해 본다.


휴일 오전에 '나는 솔로'가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무심한 듯 툭, 켜진 채 홀로 방송되고 있고 나는 풀발기(별거 아닌 단어라는 듯 ' ' 표시도 쓰지 않는 스스로에게 잔뜩 취해있다. 끝끝내 절대 작은따옴표를 쓰지 않을 것이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어느 젊은 작가의 책을 보면서 나의 성장에 대해 깨닫고 이 ㅆ......


저기까지 쓰고 있다가 급하게 '저장'을 누르고 휴대폰 화면을 껐다. '후방주의'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글을 보고 있을 때 엄마가 뒤에서 급습하던 때의 느낌으로 남편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휴,,, 깜짝이야.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남편의 동공과 코 사이를 보게 되고 그 거리를 가늠해 보다가 아아, 유치하게 이러지 말자, 하며 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는 걸 보면 아직 완전히 성장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이다. 여전히 덜 자라서. 만 나이도 시행되는 김에 조금 더 자라지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어른의 휴일이다. 여전히 비가 오니 계속 책이나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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