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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Jul 01. 2023

맘과 캣맘의 공존

바로 옆 아파트 단지의 화단과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은 맞닿아 있는데 거기가 길고양이들의 아지트가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날 지나가는 길에 보니 고양이가 꽤 많았다. 어머나, 여기 고양이가 좀 많네,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고양이를 조금 무서워하는 편이다. 어릴 때 고양이는 귀신을 본다는 말을 들었는데 왠지 진짜로 그럴 것 같아서 고양이에 대해선 언제나 조심스럽다. 뭔가 영적인 동물처럼 여겨져 눈이 마주치면 살짝 오싹하기도 하다. 고양이가 지나가면 잠시 멈췄다가 고양이가 사라지면(다 지나가고 나시면...;;) 다시 걸음을 옮기곤 하는데 그 화단엔 고양이가 제법 많아서, 게다가 움직일 의사도 없어 보여서, "지... 지나가도 되나? 저기요... 그... 그럼 먼저 지나갑니다." 하며 우물쭈물거렸던 날이 있었다.

그리하여 언젠가부터 그곳은 내게 살짝 조심스러운 길이 되었지만 아이에겐 그저 고양이가 많은 곳이었다.

"엄마, 여기 고양이 진짜 많아. 유치원 화단에도(그 길은 아이가 다니던 유치원까지 이어져 있으며 그곳 화단도 고양이들이 접수하셨다) 고양이 밥그릇이 있고, 쟤는 쟤 엄마 같아."

아들은 이미 '쟤'랑 '쟤'도 구별하고 있었지만 나는 쟤도, 쟤도, 또 쟤도 그냥 고양이님이었다.


- 고양이는 귀신 본대.

- 엄마는 그걸 믿어?

- 어, 엄마는 무조건 믿지. 고양이가 가만히 쳐다보면 우리 뒤에 귀신 있는 거야.

- 엄마는 그때 강아지도 귀신 본다고 했잖아.

- 엄마 빼고 다들 귀신 보나 보지. 얼마나 다행이야. 나한테 안 보여서.

- 우리도 고양이나 강아지 키우자, 제발. 우리 집만 아무것도 안 키워.

- 엄마는 너 키우고 있잖아. 네가 일당백이야.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 길을 걷던 어느 저녁이었다.

누군가가 저기서 고양이 밥그릇에 밥을 주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고양이가 잔뜩 몰려들었다. 아들이 신이 나서 "우와, 고양이다"하며 달려갔는데 바로 그때 고양이 밥을 주고 계시던 분이 아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오지 마! 고양이 놀란다고."


조금 뒤에서 주춤거리고 있던 나한테까지 잔뜩 날이 선 그 외침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아들의 접근에 놀란 것인지, 그분의 소리에 놀란 것인지, 먹이를 먹던 고양이들이 후다닥 물러서며 경계하기 시작했고 아들도 그 상황에 깜짝 놀랐는지 그대로 길에서 멈춰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그 대치상황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귀신이 문제가 아니구먼' 싶었다. 고양이가 너무 많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나는, 아들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잡으며 "네가 갑자기 다가오니까 고양이들이 놀랬나 보다. 길에서 사는 고양이들이라 사람들이 갑자기 다가가면 놀라. 밥 먹던 중이라서 더 놀랐나 보다." 하며 달래었다. 그분에겐 "얘가 고양이를 좋아해서 다가간 거지 다른 뜻은 없어요."라는 말을 건네었지만 잔뜩 화가 난 표정은 그대로였다. 우리가 얼른 사라지길 바라는 눈빛으로 그저 화단 안으로 숨어버린 고양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곳곳에서 고양이의 눈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 봐, 쟤들은 귀신 본다니까 ㅠㅠ'  

그 상황이 너무 불편하여 아들의 등을 떠밀며 "가자, 가자." 걸음을 재촉하였다.

"아니, 나는 그냥 고양이를 보고 싶었던 건데." 조금 억울해하는 아들의 소리가 그분에게도 들렸겠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매서웠다. 그런 눈빛을 마주하자 도리어 우리가 귀신이라도 된 듯 한 기분이 들었다.


그 일로 나는 '맘'이라는 단어를 한번 더 떠올렸다.

맘충이란 단어를 검색해 보면 '엄마'라는 입장을 특권처럼 내세워 상대방의 이권을 강탈하거나 주변사람들과 사회 전반에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히는 행위를 일삼은 여성을 벌레에 빗대 비꼬는 신조어,라고 한다.

그 '맘충'이란 말에 담겨 있는 비아냥이 결국 모든 엄마를 싸잡아서 얕보는 듯하여 그 말 자체를 너무나도 싫어하지만, 결국 그러한 시선에선 자유롭진 못 하였기에 '맘'으로 불리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를 꽤나 절제하며 살았던 나다.

그러다 보니 남이 우리 애한테 소리 지르는 걸 또 그저 멍청하게 보고만 있었네, 하는 생각이 뒤늦게 밀려들었다. 우리 아이한테 왜 소리 지르시냐고 한 마디 했어야 했나? 후회되었다. 너만 맘이냐? 나도 맘이다, 싶은 것이다. 나도 누가 내 새끼한테 쓸데없이 화내면 너무 싫다고. 바보 같이 고양이나 무서워하고 말이지. 며칠 동안 그날 저녁의 일이 계속 생각났고, 생각하면 할수록 스스로가 많이 한심해서 혼자 씩씩거려졌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들이 서로 조금은 달라서 그것들이 충돌할 때는 눈빛이 불편해지거나 매서워지는구나, 생각하다가 지금은 잠시 멈춰버린 나의 '채식'에까지 생각이 닿았다. 채식을 시작했을 때 왜 채식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넷플릭스 '씨스피라시'를 보고 너무 놀라서 환경 때문에..."라고 했다가 '진지충'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에 상처를 받곤 했다. 결정적으로 멈추게 된 것은 근무지를 옮겨 급식을 먹기 시작하면서 고기반찬을 먹지 않는 나 때문에 음식의 맛에 대해 진심으로 걱정하던 조리사님 때문이었다. 구구절절 채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가 힘들어서 그냥 멈추기로 한 것이다. 어떠한 가치를 지향하고 실천하는 일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구나 다시금 깨달았었다.


캣맘이 말이야. 우리 애한테 어쩜 그래?

'맘'이란 단어를 그렇게나 싫어했지만 나 또한 그 단어를 써가며 혼자 씩씩거렸던 순간을 이제 그만 접어야겠구나 생각했다. 그분도 자신의 가치를 위해 묵묵히 감당해야만 했던 순간들이 많았을 테고 짜내었던 용기가 있었을 테다.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순간도 많았겠지. 그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모든 가치를 지지할  없겠지만  가치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완충지대를 두어  같이 공존할  있는 지혜와 여유가 조금씩은 필요하지 않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여전히 고양이를 무서워할 테고, 맘충이란 시선에서 끝내 자유롭지 못할 테며, 대놓고 채식을 말할 용기도 없어 조금 우물쭈물거릴 테지만 내게도 지키고 싶은 가치라는 것이 있으니 우선은 남이 지향하는 가치를 혐오하지 말아 보자고 마음먹어 본다.


급식이 없는 방학 때는 채식 도시락을 싸들고 가 "저 사실 채식지향합니다."라고 말해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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