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적
한밤 중의 기적에 대하여- 무라카미하루키
소녀가 소년한테 묻는다.
" 너 나를 얼마나 좋아해?"
소년은 한참 생각하고 나서, 조용한 목소리로 "한밤중의 기적 소리만큼"이라고 대답한다.
소녀는 잠자코 다음 이야기를 기다린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뭔가 관련된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밤중에 문득 잠이 깨지"
그는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어. 아마 두 시나 세 시, 그쯤일 거야. 하지만 몇 시인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어쨌든 한밤중이고, 나는 완전히 외톨이이고,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어. 한번 상상을 해봐. 주위는 캄캄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소리도 전혀 안 들려.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시계가 멈춰버렸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나는 갑자기,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장소로부터, 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고, 격리되어 있다고 느껴. 이 넓은 세상에서 아무한테도 사랑받지 못하고,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고,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돼. 설령 내가 이대로 사라진 대도 아무도 모를 거야. 그건 마치 두꺼운 철상자에 갇힌 채,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은 것 같은 느낌이야. 기압 때문에 심장이 아파서, 그대로 쩍 하고 두 조각으로 갈라져 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이야. 이해할 수 있어?"
소녀는 끄덕인다. 아마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소년은 말을 계속한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이 살아가면서 경험한 가장 괴로운 일 중 하나일 거야. 정말이지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슬프고 괴로운 그런 느낌이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죽고 싶은 것이 아니고, 그대로 내버려 두면 상자 안의 공기가 희박해져서 정말로 죽어버릴 거야. 이건 비유가 아니야. 사실이라고. 이것이 한밤중에 홀로 잠이 깬다는 것의 의미라고, 이것도 알 수 있겠어?"
소녀는 잠자코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소년은 잠시 사이를 둔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에서 기적소리가 들려. 아주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기적소리야. 도대체 어디에 철로가 있는지, 나도 모르겠어. 그만큼 멀리서 들려오거든. 들릴 듯 말 듯한 소리야. 그렇지만 그것이 기차 기적 소리라는 것을 나는 알아. 틀림없어. 나는 어둠 속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그리고 다시 한번, 그 기적소리를 듣지. 그리고 나면 내 심장의 통증은 멈추고 시곗바늘도 움직이기 시작해. 철상자는 해면 위로 천천히 떠올라. 모두가 그 작은 기적 소리 덕분이야. 들릴 듯 말 듯한 그 정도로 작은 기적 소리 덕분이라고. 나는 그 기적 소리만큼 너를 사랑해."
거기서 소년의 짧은 이야기는 끝난다.
이번에는 소녀가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한창 좋아할 때 왜 좋아하느냐고 누군가가 물으면 이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그렇지만 그건 꽤 오래전 일이고 더 이상은 그 누구도 내가 누굴 좋아하는지, 무슨 책을 읽는지 궁금해하지 않기 때문에 이 글에 대해 이야기했던 기억도 제법 오래전의 일이다.
어제는 왜 글을 쓰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라는 사람이 이곳에서 무언가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가 거의 없기에 그런 질문은 처음 받아봤지만 어쩐지 금세 답이 떠올랐다. 다만 조금 긴 이야기라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언제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랑인데 실은 나도 그걸 잘 모른다. 그저 언젠가는 저 이야기의 뒤를 이어서 소녀가 할 법한 사랑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저렇게 담백한 어투로 정갈하고 단정하게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한다.
느닷없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수국 때문이다.
얼마 전 파란 수국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의 욕심 때문에 구연산을 녹인 물을 줬다가 수국이 새파랗게 타들어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수국을 다음날 학교 화단에 심었더랬다.
타들어간 꽃잎을 잘라내고 꽃대만 남은 수국을 다시 화단에 심은 것이 5월 말이었다.
아직 장마철도 아닌데 비가 자주 오길래 나의 수국한테는 조금 좋은 일이겠구나, 내심 좋아했다.
출근할 때마다 들여다보며 미안하다, 미안하다 얘기해 줬다. 점심시간에 다시 가서 들여다보며 조금만 힘을 내보자며 응원했다. 퇴근길이면 내일까지 무사해야 한다고 억지 다짐을 받아내곤 했다. 무언가 조금씩 자라고 있는 듯 느껴지기도 했지만 미안한 마음에 섣불리 그 '자람'에 대해 아는 척 하지 못 하였다. 얼마나 기를 쓰고 있는지 느껴졌지만 내가 알은체 해서는 안 되는 일 같아 그저 조심스러웠다.
수국을 들여다볼 때면 '한밤 중에 홀로 잠이 깬 것 같은 느낌'이란 말이 떠올랐다. 나의 수국에겐 참 느닷없고 황망스러운 일이라 온통 그러한 느낌이겠구나 생각했다. 수국에게도 한밤중의 기적이 들려오길 기도했다.
며칠 출장이 있어 학교에 출근하지 않았기에 오늘 아침 오랜만에 수국을 만났다. 출근길에 화단을 들여다봤더니 수국이 조금 푸르게 변해 있었다. 밤사이 내린 비를 맞아 파릇파릇해진 잎을 작게 흔들고 있었는데 그 말갛고 파아란 표정을 보는 순간 내가 오랫동안 궁금해했던 그 기적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수국이 있었어.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날 갑자기 우수수 잎이 떨어졌어. 그러더니 다음날은 꽃잎 끝부터 타들어가기 시작했지. 수국은 이 아픔의 이유가 무엇인지, 대체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 한순간에 떨어진 잎과 타버린 꽃잎을 모두 잘린 채 꽃대만 남은 수국은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고 그저 모든 것이 깜깜하기만 했지. 한밤 중에 홀로 잠이 깬 것 같은 느낌이었어. 주위엔 아무것도 없었어. 풀벌레 소리도,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잎을 두드리던 빛도, 파랗던 여름 하늘도 모든 것이 사라졌지. 이제는 끝이구나 생각했어. '끝'이 무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이런 게 끝이겠구나 깨달았지.
그렇게 천천히 침전하던 어느 날.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어. 누군가가 물을 뿌려주며 미안하다고 했지. 내일 다시 보자고 매일 같이 인사를 건네곤 했어. 처음에는 풀벌레 소리인가 했지. 다음 날 다시 들어보니 울음소리 같기도 했어. 가만히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수국은 조금씩 힘을 내어 보기로 했어.
벅찬 마음에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불쑥, 여기서 멈추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의 끝을 성급하게 결론 내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조금 더 숨죽인 채 지켜보며 그저 온 마음을 기울여야 할 때이구나, 깨달았다. 그리고 그 과정이야말로 내가 늘 기다려왔고 쓰고 싶어 했던 이야기들이 아닐까,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키보드 위에서 잠시 멈추기로 한다. 그저 생각할 뿐이다. 나는 나의 수국을 사랑하듯 나의 주변을 사랑하고 있으며 그러한 이야기들을 하고 싶어 오늘도 글을 쓰고 있다고...... 또, 그저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본다. 어제도, 오늘도, 어쩌면 내일도,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기적들을 떠올리며 그 소리들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주변이 온통 나의 수국들이다.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이야기들이 말을 걸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