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숙도는 왜 을숙도지?”
을숙도 문화회관 주차장의 잔디 위로 주차를 한 후 정해진 식순에 따르듯 매번 이 질문을 던졌다. 해질녘의 풍경들이 붉은빛 속에 잠겨 들고 있어 공원에 흩어져 있던 조각들의 실루엣이 조금씩 부풀기 시작했다. 붉게 젖어들며 점차 흐려지는 듯 투명해지는 윤곽을 바라보다가 툭- 던졌던 그 질문을 시작으로 하나마나인 우스꽝스러운 얘기들을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
"을숙도는 대체 왜 을숙도지?"
남자는 지명의 뜻이나 한자이름의 유래를 정확하게 아는 것을 좋아하여 내가 이 질문을 하자마자 진지한 표정으로 검색을 한 후 “새을, 맑을 숙”이라고 읊어주었다. 새가 많고 물이 맑은 섬이라 몇 번이고 일러줬지만 실제로 그걸 알고 싶어 던졌던 질문은 아니었기에 항상 못 들은 척하며 엉터리로 지명을 풀이하곤 했다.
“고을 을이겠지? 고을 을에 쑥 숙, 섬 도. 무지 간단하네.”
한자에 대한 무지를 마음껏 뽐내며 언어유희를 대단히 즐기는 척 “쑥이 많이 나는 마을이 있는 섬”이라고 내뱉으며 남자의 옆얼굴을 슬쩍 바라보곤 했다.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웃으며 나를 마주 보는 얼굴이 좋았다. 가끔 그 얼굴 위로 비행기가 낮게 지나갔는데 그럴 때면 비행기를 보는 척하며 그 얼굴을 좀 더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을숙도를 좋아하기 시작한 이유가 그거였나 싶기도 하다.
“비행기다. 또 지나가네.”
“공항이 가까우니까.”
“응. 그러네. 아까도 지나갔는데 또 지나가네. 좀 있으면 또 지나가겠지.”
“그래, 공항이 가까우니까.”
그 시절 우리의 대화는 늘 그런 식이었다. 잔디가 깔린 을숙도 문화회관의 녹색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저물어가는 여름의 붉은빛과 끈끈한 공기 속에서 나누었던 대화는 늘 그렇게 가볍고 시시했으며 조금은 초조했다.
나는 남자에게 고백을 했고 남자는 나를 거절했다. 남자의 거절 속엔 나와의 거리보단 스스로의 삶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기에 나는 나를 거절한 남자에게 끝없이 데이트 신청을 했었고 내가 싫다던 그 남자 또한 말과는 다르게 늘 나의 부름에 응했다. 그리하여 그 시절 우리가 자주 갔던 곳이 을숙도였다.
새가 많고 물이 맑은 섬. 쑥이 많이 나는 마을이 있는 섬. 그리고 '을'은 '숙'(내 이름이다)이 되는 섬, 을숙도.
퇴근 후 을숙도에 도착하면 해가 지고 있었다.
그곳엔 부산 비엔날레 참가자들의 작품을 전시해 놓은 조각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을 거닐며 조각들을 감싸고 있는 빛의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나는 종종 '이별’이라는 조각상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별한 남자의 슬픔을 무덤 속에 묻힌 얼굴로 나타내고 있었는데 그 절망스러운 표정은 물론이며 주름이라든지, 머리카락, 수염, 거친 피부의 감촉 등이 너무나도 사실적이어서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으면 조금 애가 타고 먹먹해졌다. 당시 내가 느끼고 있던 여러 가지 감정들이 그 작품으로 형상화되어 나를 마주하는 듯했다.
조각을 둘러싼 붉은 기운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푸른빛으로 변해갔고 어둠이 내려앉기 직전엔 보랏빛이 되었다. 조각의 윤곽들이 보랏빛으로 변하는 바로 그 순간 불쑥 또렷하게 떠오르면서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을숙도의 여기저기서 낮의 이야기를 끝내고 밤의 이야기를 준비하는 모습은 늘 조금은 설레고 조금은 경이로웠다. '을숙도가 왜 을숙도인지 아느냐' 하는 시시한 이야기조차 그곳에서는 신비한 전설처럼 여겨졌다.
남자는 나뿐 아니라 스스로에게까지 나를 거절할 기회와 이유를 찾고 있었기에 남자에게 그러한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선 을숙도에 있어야만 했다. 이곳만큼 빛의 붉음과 푸름, 밝음과 어둠의 변화가 조화롭고 신비한 곳이 있을까?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빛이 일렁이고 주변의 색채가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그저 아름답기만 하여 아득히 고요해지곤 했다. 진심이라고 믿고 싶은 거짓과 거짓이라고 믿고 싶은 진심들은 그곳의 풍경과 함께 소소한 이야기가 되어 평화롭게 다가왔으며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었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몇 번이고 말해주었다.
낮게 지나가는 비행기 소리, 강물 위를 달리는 바람소리, 조용히 흐르는 물소리, 새들의 날갯짓 소리, 풀벌레의 울음소리, 저 멀리서 갈대가 흔들리는 소리. 그 모든 소리들이 낮보다 밀도가 낮아진 공기에 섞여 들어 밤을 준비하고 있었다.
언젠가의 밤에 나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내 울음 앞에서 남자가 쩔쩔매는 것이 느껴져 더욱더 서러웠다. 눈물이 거세게 흘러내렸다. 머리 위로 비행기가 두어 번쯤 더 지나갔고 풀벌레 울음소리가 조금 더 요란해졌을 때쯤 남자가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남자의 손은 땀에 젖어 있었다. 을숙도가 품고 있는 밤의 이야기 속엔 우리의 이야기도 얼마쯤은 있을 터였다.
을숙도를 다시 찾은 것은 그 후 한참 뒤였다. 낮의 을숙도는 오랜만이었다. 자리를 펴고 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는 가족들이 많았다.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손자들의 손을 잡고 있는 노부부의 모습도 보였다. 초록이 너울대는 을숙도의 풍경 속에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눈가를 두드리며 내려앉았다. 그 눈부신 소란스러움이 좋았다.
아이가 풍선을 사달라고 졸라서 풍선을 사다가 손가락에 묶어주었다. “풍선이 날아가잖아. 꼭 잡아야 해.”했더니 아이가 하늘을 한참이나 올려다보았다.
나를 보며 “엄마, 하늘이 커요!”라고 하더니 남자의 손을 흔들며 “아빠, 하늘이 할머니 집 같아요”했다. 하늘의 넓고 푸른 모양새가 할머니 집 근처에 있는 바다 같았나 보다. 남자가 아이를 번쩍 들어 목마를 태웠다. 아이가 까르르 웃다가 풍선을 놓칠 뻔하며 기우뚱거렸다. 얼른 붙잡으며 둘 다 조심하라고 잔소리를 했다.
그날에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그 밤에 내가 눈물을 흘렸던 곳은 발음하기도 어려운 ‘아나톨 헤르츠펠트’라는 조각가의 '집’이라는 작품 안이었다. 조각 공원 안에 조금 이상하게 생긴 원목 재질의 벤치가 있었는데 남자와 나는 그 벤치를 보면서 "이건 왜 만들다 말았대? 앉을 수가 없잖아.”하며 투덜대곤 하였다. 설마 그게 조각 작품이었을 줄이야.
“자기야, 이게 벤치가 아니라 조각이었네? 우리가 남의 작품 위에서 대체 뭘 한 거니?”
“그래? 뭐, 암튼 나쁜 짓은 안 했거든?”
생태공원의 산책로를 걸으며 남자와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낮게 지나가는 비행기는 여전했다. 아이는 비행기가 지나갈 때마다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을숙도는 왜 을숙도지?”라고 기습적으로 묻자 남자가 잠시 놀라더니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의 웃음 뒤로 햇살과 바람이 함께 내려앉아 강물 위로 흩날렸다. 을숙도의 풍경 중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 사진 출처: 부산관광공사 공식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