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쓰는 편지
하늘이, 아직은 여름 하늘이라 전화했다던 장면
온통 여름으로 응축된 그 소설에서 내가 유독 좋아하는 장면이지. 그 청춘들은 그 후에도 7번 국도를 달렸을까. 달리고 나서도 아직 여름이었을까.
내가 자주 이야기해서 너도 소설 '7번 국도'쯤은 알고 있을 거야. 아직은 여름 하늘이어서. 이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 중 하나지. 네가 내 길 위에 나타났던 그 해의 여름이 시작될 무렵. 살면서 내가 보았던 모든 여름을 이번 여름에 모조리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뜨거우면서도 차가웠던 그 해 여름 하늘 아래서 내내 생각했던 사람은 너였기에 소설 속의 청춘들처럼 나도 전화를 걸어 "아직은 여름 하늘이어서..."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
너는 여름이 지나도록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고 조금은 모질었기에 아직은 여름 하늘이라는 말에 기대어 한번 더 내 맘을 던져보고 싶었지. 너도 여름을 좋아하니까. 여름이 품고 있는 온도와 일렁임을 너도 이해하니까.
너는, 진작에 알아챘을 내 마음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 한 척하며 언제나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고, 그런 너를 기필코 미워하고 말 테다, 수없이 다짐했지만 번번이 맨 몸으로 그저 여름 하늘 아래에 내던져지고 말았지. 네 웃음에 담긴 마음이 무언지 알아내기 위해 울고 웃고 했던 기나긴 밤동안 네 생각을 하면서 7번 국도를 보아서 그런지, 7번 국도를 보면서 네 생각을 해서 그런지... 너를 생각하면 7번 국도 위를 달리는 듯했고 그 길과 네가 이어져 있는 것 같았어. 참 이상하지? 난 그때까지 7번 국도를 알지 못했는데 왜 그 길은 이미 내가 아는 길 같았고 그 길 어딘가에 네가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을까.
네 웃음에 담긴 감정들은 어차피 실체가 없는 것들이었기에 그 길의 실체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저 너를 향해 솟구치는 설렘과 나를 모른 체하는 네 비정함에 사정없이 흔들리며 상상 속의 7번 국도를 달렸던 건가 봐.
뜨거웠고 맹렬했고 조금은 가혹했던 여름밤이 나의 7번 국도 위에 있어.
그 해 여름은 '이제 여름이 끝났구나' 하던 밤도 있었고, '본격적인 여름이 이제야 시작이구나' 하던 밤도 있었어. 여름의 끝과 시작을 결정하던 건 오직 너였기에 나는 매번 속수무책으로 네 결정을 기다렸지.
이제는 조금 오래전의 이야기들이야. 가끔은 나조차도 '그랬었나?'싶은 기억들이지. 수염도 깍지 않은 몰골로 다 늘어진 츄리링을 입고선 그보다 더 늘어진 자세로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너를 쏘아보다가 "으이그, 인간아!"라고 중얼거리는 내 모습에 익숙한 너한텐, 특히나 저 이야기들은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겠다? 전설 속의 이야기려니 싶겠지?! 사실 저건 우리의 이야기인데 말이야.
거의 잊은 채 살지만 가끔씩 떠오를 때가 있어. 에어컨을 끄고 창을 열었는데 뜨거운 기운이 들이쳐 순간적으로 진공상태처럼 느껴지는 몽롱한 밤이나, 차가운 유리잔에 맺힌 물방울 위로 어른거리는 눈동자를 마주할 때나, 풀벌레 소리가 들릴 무렵 불어오는 바람을 느낄 때면 7번 국도와 그 위에 서 있던 너와 아직은 여름인 하늘을 만나.
우리가 몇 번의 여름을 함께 했지?
살면서 보았던 여름 중 가장 아름다웠던 여름은 언제였을까. 아직은 여름 하늘이라고 했던 그 하늘은 이번 여름에도 여전할까?
어쩌면 여름이 짙어진 어느 밤에 너한테 불쑥 말할지도 몰라. "아직은 여름 하늘이라서..."라고 말이야.
찰떡같이 알아들은 네가 내 손을 끌어준다면 이번에야말로 내가 아는 7번 국도를 알려줄게.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여름 하늘을 만나러 가자.
여전히, 아직은 여름 하늘이니까.
여전히, 조금은 뜨겁고 조금은 가혹하고 조금은 몽롱한 여름 하늘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