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첫 친구는 샐리다. 아들의 태명이 빌리여서 빌리 친구는 당연히 샐리지, 하며 지었던 이름이다.
아들이 태어난 지 100일쯤 되었을 때 복직을 했다. 내가 없는 동안 혼자 있을 아들에게 엄마 대신 같이 놀아, 하며 손에 쥐어줬던 인형이 샐리였다.
검색을 했더니 컬러가 다양한 장난감이 아이 시력 형성에 좋다고 하여 저 인형을 골랐던 건데, 아들은 샐리가 항상 웃고 있어서 너무 이쁘다고 했다.
9살 아들의 매 순간을 함께 해 온 샐리. 아들 사진을 정리하다보면 항상 샐리가 있다.
선명한 색감의 옷을 입은 샐리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부터, 초록색 꼬리를 하도 잡고 다녀 헤어진 꼬리를 보곤 어느 날인가 울음을 터트린 아들 때문에 낡은 천으로 새로운 꼬리를 만들어준 후에도, 옆구리가 다 터져 새 솜을 넣어줬지만 다시금 납작해져 버린 지금까지도, 샐리는 아들과 함께 있다.
"엄마, 샐리는 생일이 언제야? 나랑 나이가 같으니까 생일도 같을까?"
"엄마, 샐리는 어디서 태어났어?"
"엄마, 샐리가 내 동생이면 좋겠어. 샐리가 말을 할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할까?"
형제 없이 자라서인지 한동안은 샐리를 정말 사람처럼 대하여 조금 걱정하기도 했으나 초등학생이 된 후부터는 샐리가 인형이라는 걸 받아들인 듯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들의 작아진 옷들과 더 이상 가지고 놀지 않는 장난감들을 정리해서 아름다운 가게로 보내곤 하는데 그럴 때면 혹여나 내가 샐리를 어찌할까 봐 품에 꼭 끌어안는다.
"엄마, 샐리는 안돼. 나는 어른이 되어도 샐리는 안 버릴 거야."
내 나이에도 인형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 친구들이 알면 놀릴 텐데.
포켓몬에 빠진 9살 남자애가 여전히 아기 때처럼 인형을 손에 꼭 쥐고 잠든다는 사실을 누가 알까 봐 걱정하던 요즘이었는데, 며칠 전 아들 친구가 집에 놀러 왔다가 샐리를 발견하고 말았다.
좀비 놀이를 하며 하도 뛰어다니길래 아래층의 아기가 낮잠을 자다 깨겠다 싶어, 차라리 침대 위에서 뛰라며 침대로 쫒았던 건데 거기에 샐리가 있었다.
"야! 너 이거 뭐야? 너 인형 가지고 놀아?"라는 친구의 말에 아들의 얼굴 위로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9살 샐리는 색이 많이 바래고 낡았다
첫 뒤집기를 시도했을 때 잘 뒤집어지지 않아 샐리를 손에 꼭 쥐곤 울음을 터트렸던 한 살의 아들
샐리를 '땔리'라고 부르며 어디를 가든 초록색 꼬리를 손에 꼭 쥐고 다녔던 두세 살의 아들
여행 준비를 할때면 샐리부터 트렁크에 챙겨 넣었던 네 살의 아들
자꾸 말썽 부리면 샐리 버릴 거야, 했더니 엄마 재쫑해요, 하며 두 손을 모았던 다섯 살의 아들
"샐리 좀 치료해줘!" 터져버린 옆구리 사이로 빠져나온 솜에 깜짝 놀라 달려왔던 여섯 살의 아들
샐리 꼬리는 예쁜 초록색인데 엄마는 왜 이런 꼬리를 달았냐며 엉엉 울던 일곱 살의 아들
세탁기에서 나와 거꾸로 매달린 샐리에게 "괜찮아, 곧 예뻐질 거야" 하며 안타깝게 지켜보던 여덟 살의 아들
그 모든 시간 속의 표정들이 바로 그 순간, 아홉 살 아들의 당황스러움 속에 녹아 있었다.
"이거 너 인형이야?" 다시 한번 더 이어진 물음에 "아니야! 좀비 놀이할 때 쓰는 거야"라고 대답한 아들은 샐리를 바닥으로 던졌다.
그리곤 친구와 함께 샐리를 던지며 발로 밟고 차면서 놀기 시작했는데, 장난꾸러기 9살 남자애답게 낄낄거리고 있었지만 내 눈엔 이상하게도 좀 슬픈 광경이었다. 할머니가 샐리를 실수로 떨어트리기만 해도 난리였다. 샐리의 솜이 더 가라앉고 어깨가 더 터질까 봐 빨지도 못하게 하는 아들이었다. 아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샐리를 걷어차고 소리 내어 즐겁다는 듯 웃고 있을까?
"애들아, 이거 아줌마가 아끼는 인형이야" 하며 샐리를 바닥에서 집어 들었을 때 아들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 순간 스쳤던 아들의 눈빛에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아 숨을 꾹 삼켜야 했다.
아들이 온 마음을 담아 엄마, 하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아들 대신 샐리를 꼭 끌어안아야 했다.
"아줌마도 인형 가지고 놀아요?"
"그러엄! 어른도 인형 가지고 놀아. 아주 오랜 친구는 소중한 거야."
그날 밤 샐리를 끌어안고 잠들 준비를 하는 아들에게 아까 속상했냐고 물었다.
친구들이 인형 가지고 논다고 놀릴까 봐 걱정했느냐, 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도 4학년 때까지 미미라는 인형이 있었어. 밖에 나갈 땐 옷도 갈아입혀서 가지고 다녔어. 이런 건 창피한 게 아니야.
나의 말에 아들은, 난 어른이 되어도 샐리 안 버릴 거야,라고또 한 번 선언했다.
그래, 그런 어른들 많아. 애착 인형 버리지 않는 사람들 정말 많아.
잠들기 시작한 아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대답했다.
그 날밤 남편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얘기해줬더니 잠든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 보며 점점 커가네, 하고 씨익 웃었다.
언젠가는 아들이 샐리에게 안녕을 고하게 될까? 그동안 즐거웠어, 하며 손 떼 묻은 샐리의 꼬리를 놓아줄까?
그날이 온다면 내가 더 슬플까, 아들이 더 슬플까 생각해본다. 샐리 꼬리를 꼭 쥐고 잠든 아들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예전보다 손가락이 굵어진 듯하여 괜스레 서운해져 오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더 속상한 쪽은 나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직장과 육아에 넌더리 나게 지쳐버린 어느 하루 끝에 너는 제발 얼른 자라 버려라, 하며 울음을 터트렸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시간이 조금은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하루 끝에 서 있다. 무슨 이런 심술이?! 하며 괜스레 시간을 탓해본들 소용없는 일.
우리의 오랜 친구, 샐리의 어깨나 잘 수선해봐야겠다. 조금은 더 옆에 있어달라고, 샐리를 잘 다독이며 내 편으로 만들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