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블로거가 있다. 늘 그랬듯 혼자 염탐(?)한다. 그분은 기록광인데 한참 동안 글을 쓰지 않고 있다가 최근 들어 다시 기록에 대한 글을 올리고 있다. 보다 보면 너무 귀엽고 재밌다. 아무거나 적고 있다며 진짜 아무거나 적은 메모를 아무렇게나 찍어 올리는데 그 '아무거나'들이 너무 소소하고 앙증맞다. 뭔가 작고 귀엽고 예쁜 것들이 가득한 문구점을 구경하는 기분이 든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아무도 읽지 않을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스스로는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며, 근데 난 사실 그저 끄적이는 게 기분 좋아서... 헤헤헤~ 하고 있는 모습조차 귀여웠다.
쉽게 고무되는 나답게 보다가 잔뜩 자극받아 또 일기장을 펼쳐 들었다.
2018년도부터 쓰고 있는 일기장이 있는데, 매번 이럴 때만 쓰고 있어서 아직 1/3도 다 채우지 못했다. 주로 남편 욕이 적혀 있다. 쌍욕도 있어서 남편은 절대 보면 안 되는 노트다. 어제 저녁에 비 소리를 들으며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손가락이 아파서(손글씨는 이상하게 힘들다. 게다가 늘 가운데 손가락만 아파와서 "여기가 아파"라고 고통을 호소하려 해도 마치 욕하는 것 같아 보여 동정심을 얻지도 못한다.) 한 페이지도 다 쓰지 못했다. 별수 없이 휴대폰을 들어 브런치 화면을 연다.
그리하여 지금부터 일기장에 쓰다가 만 '아무거나'에 대한 기록이다.
1. 3주 전부터 이상형은 덱스다. 한시적 이상형일 것 같은 예감이 들지만 암튼 현재로선 덱스다. 태어난 김에 사는 남자의 세계여행이 너무 재밌어서 매번 챙겨보고 있는데 기안 84든 인도든 뭐든 난 사실 잘 모르겠고, 그냥 재밌다. 역시 잘생긴 남자가 최고인 거 같다. 덱스가 화면에 나오면 어쨌든 아무튼 지간에 무조건 재밌다. 덱스가 길을 걷고 있으면 처음 보는 인도 여자들이 넌 아이돌이니 물으면서 알러뷰~ 하는 것조차 재밌어 죽겠다. 너네도 나처럼 그냥 재밌어 죽겠구나? 싶다. 지구는 어쩌면 생각보다 아주 쉽게 하나가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2. 나는 귀신을 싫어한다. 이 말을 하면 "귀신은 누구나 다 싫어해."라고 하는데, 다시 정정하자면 싫어한다기보단 정말로 많이 무서워한다. 싫어한다고 하면 귀신 입장에서도 조금 서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귀신이라고 귀신이 되고 싶어서 된 건 아닐 텐데 다짜고짜 싫다고 하면 괘씸해서 나한테 올지도 모르겠구나 싶다. 암튼 귀신을 싫어하는 건 절대 아니고 아주 많이 무서워하고 어려워하는 편이다. 고3 시절 내내 가위에 시달렸던 나는 결코 그 존재를 '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공포의 대상은 나름 실체가 있는 것으로 평생 그들과는 절대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며 조심스레 살아가고 있다.
그런 이유로 공포물은 여간해선 보지 않는다. 가능하면 절대 보지 않기 때문에 요즘 방송 중인 드라마 '아귀'도 절대적으로 보고 싶진 않다. 그렇지만, 공포물을 좋아하는 아들이 남편과 함께 거실에서 아귀를 보고 있고 오며 가며 어쩔 수 없이 보다 보니 재밌긴 재밌어서 자꾸만 궁금해지고 만다. 절대 안 봐야지 하는데 결국은 곁눈질로 보게 되는 것이다. 공포물 주제에 왜 그렇게 재밌는 걸까. 귀신은 자기들이 이렇게 소비되고 있는 걸 알까? 이렇게 재밌는 공포물이 제작되지 않도록 귀신들이 항의라도 좀 해줬으면 좋겠다.
그날은 남편과 맥주를 나눠마시고 잠들었고 새벽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깼다. 거실도, 화장실도, 온통 시커매서 너무 무서웠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남편을 깨워서 겨우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다음날 남편이 '잠결에 네가 그랬던 거 같은데?' 하며 기억을 해내었고 후다닥 고맙다고 인사했지만 역시나 약점이라도 잡은 듯 놀려댄다. 젠장, 귀신은 정말 어려운 존재다.
3. 비가 너무 많이 오고 있다. 아침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학교를 한 바퀴씩 돌며 이것저것 살피는 일이다. 괜찮았는데, 이틀 전부터 여기저기서 물이 조금씩 새기 시작했다. 다른 학교 사정을 들어보니 우리 학교 정도면 선방하고 있는 것 같긴 하다.
영양사 선생님 방 천장에서 물이 줄줄 새고 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욕조만큼이나 커다란 대야(대용량의 음식을 조리하는 곳이니....)를 가져다가 새는 물을 받고 있었다. "어떡하죠?"라고 묻길래 일단 조금만 참아보라, 달래고 나왔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점 보러 가고 싶다. 물이 어디서부터 새고 있는 걸까요? ㅠㅠㅠㅠ
4. 올 초에 분명히 '1년간 옷 안 사기'를 결심했는데 어제 가만히 살펴보니 옷을 다른 해보다 더 많이 산 거 같았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게다가 나는 그 어느 해보다 옷을 그지같이 입고 다니고 있는데. 뭐... 학교 가봤자 매일 배수로나 봐야 하고 물 새는 거나 봐야 하니까, 싶은 맘에 대충 입고 다니긴 하지만 그럼 내가 산 옷들은 다 어디 간 거지? 싶다. 가을부턴 진짜 옷을 안 사야지.
5. 얼마 전의 '빌어먹을 저가항공'과 이어지는 글이다. 나는 요즘 에어아시아와 헤난 리조트에 매일 같이 메일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에어아시아엔 네가 항공권을 취소하는 바람에 내가 보라카이를 못 가게 되었는데 왜 내 카드 결제를 아직도 취소해주지 않느냐, 네가 빨리 취소해 줘야 내가 다른 항공권을 구입할 수 있다며 빨리 환불해 달라고 독촉 중이다. 이것들이 진짜 양아치 같은 것이 항공권만 취소하고 내 카드 결제 내역은 취소를 안 해주고 있다. 진짜 개양아치다.
헤난 리조트에는 매일 같이 구구절절 사정하는 편지를 보내고 있다. 빌어먹을 에어아시아가 내 항공권을 취소하는 바람에 나는 그 날짜에 도저히 보라카이를 가지 못 하게 되었다. 네가 나를 불쌍히 여겨 취소해 준다면 나는 정말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며 매번 우는 소리를 가득 담아 편지를 쓴다.
헤난은 예약사이트를 통해서만 답을 해온다. 싫다고 하네?!
어제는, 사실 난 한국의 유명한 여행 인플루언서이고 네가 취소만 해준다면 나는 너에 대해 정말 좋은 글을 써서 홍보해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며 메일을 보냈다. 그들은 아직도 답이 없고 예약 사이트에선 호텔 측에서 여전히 취소를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 뻥인걸 눈치챘나 보다. 진작에 좀 유명해질 걸 그랬다.
6. 내가 이 모든 취소에 성공한다면 그 덕은 전부 파파고 번역기 덕분이다. 파파고 최고.
7. 영어 공부 할 거다. 파파고가 번역해 내는 글을 보면 전부 내가 아는 단어들인데 나는 그 단어를 써서 말을 하거나 글을 쓰질 못 한다. 파파고를 쓰다 보면 내가 좀 멍청이같이 느껴진다.
8. 내가 좋아하는 필기구다. 저 연필은 예전에 예스 24에서 굿즈로 받은 스누피 연필이다. 저 연필이 갖고 싶어서 책을 샀는데 이제 2자루 밖에 남지 않았다. 아들이 보면 맘에 들어할까 봐 감춰놓고 있었는데 며칠 전에 실수로 꺼냈다가 아들이 보게 되었고 그 연필은 이제 아들 것이 되었다. 아까운 건 아니지만 조금 안타까운 건 사실이다. 아무거나 쓰지만 아무거나로 쓰진 않는다구.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