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아라빌리 Sep 25. 2023

과연 비키니는 기세인가

D-61

얼마   혼자 산다에서 박나래가 전투적으로 외쳤다. 비키니는 기세다. 

바다를 찾은 그녀가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던지자 빨간 비키니가 드러났는데 그때 했던 말이다. 최근 들었던 말 중에 가장 멋진 말이었고 정말이지 크게 공감했던 말이었다. 비키니는 기세다!!


보라카이 여행을 결심한 후 가장 먼저 구입했던 것이 비키니 수영복 3벌이었다. 보라카이 여행 후기를 검색할 때면 확실히 여행 인플루언서들의 글이 대다수였기에 비키니를 입은 아름다운 사진을 꽤 볼 수 있었다. 보라카이에 가면 다들 비키니 정도는 입어주는 건가. 나도 입고 싶은데? 하다가 덜컥 3벌이나 주문했더랬다. 블로그에서 추천하고 있는 쇼핑몰에 접속하여 홀린 듯이 주문했던 것이다. 이전까지 비키니는커녕 원피스 수영복조차 입어본 적이 없는데(당연히 수영도 못 한다) 무슨 맘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나 또한 기세였나 보다.


택배 박스가 도착한 날. 주문한 비키니 3벌 중 한 벌을 입어보곤 조금 우울해졌다. 그럭저럭 잘 감추고 살았던 터라 스스로도 내 몸이 그 정도(?)인 줄 몰랐던 것이다. 내 모습은 뭔가... 그... 그... 뭐랄까. 미쉐린 타이어의 마스코트에 비키니를 입혀놓은 듯한 실루엣이었다. 라인의 굵기를 떠나 무언가 매끈하지가 않았고 이음새마다 울룩불룩했다. 손바닥만 한 수영복을 내려다보며 과연 이 안으로 내 몸이 들어갈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힘겨운 과정이 있었으나) 겨우겨우 몸을 집어넣을 수 있었다... 는 사실에만, 만족해야 하는 실루엣이었던 것이다.

샀노라, 입었노라, 그럼 됐노라.

웃긴(처음부터 웃긴 옷은 아니었지만 웃겨지고 말았다) 수영복을 입은 거울 속의 존재가 바로 '나'라는 사실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확실히, 비키니는, 기세였다. 기세가 아니면 도무지 입을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기세가 부족한 나로선, 나머지 두 벌은 입어보나 마나였기에 바로 반품 신청을 했으며 한번 착용했던 비키니는 상품 특성상 반품할 수 없어 옷방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중이다.


내 몸에 비키니는 무슨 비키니?! 저 물건은 아이돌이나 MZ세대만 입을 수 있는 물건이야.

평생 그래왔던 것처럼 비키니는 금세 나에게서 잊혀 갔는데, 다시금 비키니를 떠올리기 시작한 것은 프리다이빙 때문이다. 보라카이에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체험들을 검색하던 중 프리다이빙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문어선생님'을 본 후로 프리다이빙에 관심이 생겨 이것만큼은 꼭 해야지, 다짐했더랬다. 바닷속을 내 눈으로 바라보며 유영하고 싶었다. 비록 수영은 개코도 못 하지만, 수영 못 해도 된다는 말을 어디서 보았다. (쭈굴)

프리다이빙 호핑 프로그램도 있었는데, 그 업체의 후기를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나보다 나이가 조금 더 있어 보이고 머리카락도 살짝 희끗희끗하신 분이 비키니를 입은 채 프리다이빙 하는 사진을 보게 되었다. 패들보드에 앉아 쉬고 있을 때 미소 짓고 있는 눈가의 주름이 너무 여유롭고 멋져 보였다. 살짝 그을린 피부와 탄탄해 보이는 몸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비키니를 착용한 채 보라카이 바다와 함께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는데 그 사진을 보다가 다시금 그렇게 마음이 꿈틀거린 것이다.

우와, 나도 비키니 입고 다이빙하고 싶다.


그때부터 프리다이빙 후기만 검색 중이다. 주말 동안 프리다이빙만 보았더니 내내 바다 안에 잠겨 있는 기분이다. 바닷물을 너무 많이 마셔 입맛이 짜고 배가 부르다. 햇빛에 그을려 피부도 조금 따가운 것 같다. 바다 안에서 올려다본 물살과 햇살의 일렁임까진 아직 상상이 잘 되지 않아 그것만큼은 그저 꿈결 같지만, 지금도 여전히 내가 있는 곳이 바다 속 같다.

귀와 코가 맹맹하고 숨이 조금 가빠와 잠시 쉬는 동안엔 패들보드 위에서 비키니를 검색하였다. 노란색 상의와 초록색 하의는 바다와 썩 잘 어울리겠다 싶어 장바구니에 담아뒀다. 신이 나서 다시 바다 안으로 뛰어들었다.  

예그리나 다이브센터의 프리다이빙 사진

어느 다이브센터의 홈페이지에선 인생샷을 원한다면 채도가 높은 컬러의 의상(빨간색, 형광핑크)을 입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이건 너무 과하지 않나...라고 생각되는 복장이 수중에서 가장 예쁘다며 용기를 내어 도전해 보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이건 너무 과하지 않나,라고 생각되는 비키니를 입기엔 너무 많은 기세가 필요할 것만 같다. 그럭저럭 내게 어울리는 비키니를 찾아내어 '비키니는 기세거든요!'라고 외치던 박나래를 흉내 내고 싶다. 나이든, 몸매든 무슨 상관이람, 하며 잔뜩 기세를 올려 비키니를 입은 채 다이빙을 하고 싶다. 어차피 얼굴도 제대로 안 보이는데 저렇게 사진 한 장 남길 거라면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비키니여도 괜찮지 않을까. 호흡이 가빠오는 것은 바다 안이라서 그런 걸까, 비키니 때문에 기세를 모으느라 그런 걸까. 조금씩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 사진 출처 예그리나 다이브센터 홈페이지

매거진의 이전글 보라카이에서 가성비 찾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