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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Oct 08. 2023

보라카이에선 무얼 입을까 2

D-48

동남아 여행만 처음인 것이 아니라, 여행지에서 물놀이를 계획한 것도 이번이 거의 처음이다. 물놀이를 좋아하는 아들 때문에 가족 여행을 갈 때 수영장이 있는 숙소로 가긴 하지만 막상 그곳에 가서도 내가 물놀이를 하는 경우는 없었다. 주로 남편이 아들과 놀아주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사진을 찍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물에 들어간 경험 자체가 아주 드물며 당연히 수영도 못 하기에 내가 물놀이를 한다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그런 내가 보라카이 여행을 결심한 것 자체가 여전히 의아스러운 일이긴 하다. 선셋 사진 하나에 끌려 여기까지 오다니... 알고 보니 그러한 선셋은 꽤 드물게 볼 수 있다는데 말이다.  


보라카이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프리다이빙 체험을 하기로 했다. 호핑 프로그램도 두 가지나 예약했고, 스쿠버다이빙도 계획되어 있기에 수영복을 아주 꼼꼼하게 보고 있는 중이다.

수영복만큼은 내가 단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는 물건이라(어쩌면 어렸을 땐 입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기억엔 전혀 없기에, 아기 때 배넷저고리를 입었겠지? 잘 어울렸으려나? 하는 것처럼 그저 아득하다) 내 체형과 조화로운 것이 어떤 종류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처음엔 마냥 예쁜 것을 구입했다가 모조리 반품했고, 이 정도면 적당하겠지 싶어 주문했던 것도 역시나 갸웃거려져 반품하고 있다.

나의 행태를 지켜보던 남편이 "아이돌이나 입을 법한 그런 수영복 말고 현실적으로 네가 입을 수 있는 것으로 주문해 봐. 살 빼서 입을 수 있는 범위가 있을 거 아니야. 네가 두 달 안에 아이돌 몸매가 될 순 없잖아."라고 조심스레 말한다. 아주 고심하며 상당히 신중하게 내 눈치를 살피다가 지금이 기회닷! 싶을 때를 노려 매우 조심스레 건넨 말이었을 테다.

그렇지만 그걸 누가 모르나?

저기요, 있잖아요, 아저씨! 내가 지금 샀다가 반품하고 있는 수영복들이요오~~ 아이돌이나 입을 법한 옷들이 아니그등요? 눼에? 겁나, 겁나, 겁나, 세상에서 제일 무난한 수영복이거든요? 설마 하니 내가 지금 쭉쭉빵빵한 핫걸들이나 입는 비키니를 주문하고 있을라고요???!!! 그런 비키니는 내 몸에 걸쳐지지도 않아요. 난 그저 거기까지 가서 잠수복 같은 걸 입고 싶지 않을 뿐이라고요.

소리를 지를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면 조금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암튼 나는 지금 꽤나 신중하고 예민하게 수영복을 고르고 있다. 더 이상의 실패와 반품은 없어야 한다.


내가 반품하지 않은 수영복 1

팔과 엉덩이가  가려진다. 다만,  몸에 착용했을  허리 부분이 저런 실루엣은 아니다.

내가 반품하지 않은 수영복 2

살 빼서 호핑 때 이 정도는 화사하게 입어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이제 두 달도 남지 않아 초조하다. 살이 안 빠진다.


오전 3시 16분이란 시간을 보고 나도 놀랐다. 나는 요즘 이 정도로 진심인 것이다, 수영복에.

내가 고민 중인 수영복 1

나도  취향이 이런   몰랐는데  셔링과 소매가 너무도 사랑스럽다. 지극히 하이틴스럽고 소녀 같은 수영복이라 나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어디 가서  취향이라고 말하기엔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내가 어디 가서 누군가와 수영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암튼, 이건 모두 빨간 머리 앤을 좋아해서 그런 거라 생각한다. 보기엔 너무 이쁜데 저걸 입은 내 모습을 상상하는 건 스스로도 많이 힘들다. (웩!)

내가 고민 중인 수영복 2

이건 좀 무난하게 입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사실 저 모델이 아주 가느다란 체형이라 그렇지 앞면이 보기보단 좁은 편이며 등은 홀라당 다 파여 있다.

내가 고민 중인 수영복 3

이것도 진짜 너무 예쁘다. 역시 이 모든 것은 빨간 머리 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소매가 잔뜩 부푼 옷을 입고 싶어 한 앤을 이해하지 못했던 마릴라 아주머니에 대한 서운함이 아직도 내겐 많이 남아 있다.(아니, 그니까 왜?)

이건 그냥 안 입더라도입지 못 하더라도 소장하고 싶다. 죽을 때 관에 같이 넣어달라고 할까, 생각 중이다.

내가 고민 중인 수영복 4

내가 제일 입고 싶은 수영복은 이거다. 사실 이건 남편이 말한 대로 '아이돌이나 입을 법한 수영복'이며 마흔 중반의 아줌마가 입고 싶어 할 만한 건 아니다. 아마도, 나는, 저 상의의 동그란 고리 사이엔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대신 다른 곳이 충분히 튀어나와 있을 것이다. 어휴, 참내... 이미 많은 수영복을 주문하여 입어보았고 남편이 알기 전에 반품해 보았기에, 저걸 입었을 때의 내 실루엣에 대해선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그렇지만, 꼭 저렇게 입고 프리다이빙을 하고 싶어서 매일매일 보고 있다. 몸무게가 지금보다 딱 3kg 정도라도 빠지면 좋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저걸 사서 기세 좋게 입어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살이 빠질 것 같지가 않다. 상상만으로 다이어트에 성공했단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기왕 이렇게 돼버린 거 그냥 저 수영복도 나중에 관에 같이 넣어달라고 할까, 고민 중이다.  

지금 내가 하는 짓으로 봐선 나중에 관에 같이 넣어야 할 수영복이 꽤나 많은데 내 짐을 정리하며 슬퍼하던 아들이 그 수영복들을 발견하곤 그래도 우리 엄마, 한 세상 즐겁게 살았구나? 하며 피식 웃을 수 있을 테니, 그럭저럭 의미 있는 일 아닐까? 역시..... 입지 못 하더라도 이걸 사는 것이 맞을 것 같기도 한데 말이지......


수영복 쇼핑을 하면서 장례식까지 생각하느라 고민이 참 많은 요즘이다.


# 사진 출처 메이비치, 비키니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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