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아마도 나는, 여름을 좀 좋아하나 보다.
'여름이었다'라는 말에 담긴 느슨한 그리움과 오후 7시 즈음의 오렌지 빛 햇살을 머금은 계절이라, 아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마음 한 귀퉁이를 살짝 여름에게 내어주고 있다,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여름이 다가오는 봄부터 마음이 들뜨기 시작하여 드디어 여름이면 무언가를 쓰고 싶어지는 걸 보니 확실히 여름을 좋아하는 것이 맞나 보다.
# 너무나 많은 여름이
이 책은 작년에 읽었던 책이다. 책장에 읽지 않은 책이 너무 많아서 저 책들을 다 읽기 전엔 새 책을 사지 않겠노라 결심한 직후였기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더랬다. 사실 그 작가의 소설은 대부분 잘 이해하지 못 하는데 매번 그 특유의 감성에 끌려 읽고 만다. 작년에 이 책을 읽을 때 이상하게 설레었고 어딘가 아픈 듯 뭉근하게 들떴기에 올해 결국 이 책을 사고 말았다.
책 표지가 바뀌었나 본데 작년 것이 더 맘에 든다. 어차피 살 것을 그냥 작년에 살 것을 그랬나 보다. 작년의 초록빛 표지는 한없이 청량하여 여름의 시작 같았는데 올해의 표지는 오후 햇살이 담겨 있어 여름의 끝자락 같다. 책 표지가 온통 '여름이었다'를 말하고 있는 거 같아서 조금 애틋하다. 역시, 그냥 작년에 샀어야 했다.
# 내게도 너무나 많은 여름이 있는 것 같다. 한참 동안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지난여름에 다 했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불쑥불쑥 마음이 들뜨곤 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사무실에선 인사이동이 있었고 새로 발령 받은 직원은 소설을 쓰는 사람이었다. 겸직허가 결재를 하면서 내가 쓰다 말았던 글들을 떠올렸다. 아, 나도 한동안은 무언가를 쓰는 사람이었구나. 잠시 멍한 기분으로 멈춰 있었다.
# 그 직원이 쓴 소설은 생각보다 훌륭했다. 그 소설을 읽고 있으려니 나는 그만 여름 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어져 잠시 내가 무언가를 쓰던 때는 아마도 여름이어서...라는 말만 스스로에게 하고 있었다. 그러다 작년에 썼던 여름이었다는 글을 뒤져 보았고 당시의 내 맘을 알 듯 말 듯하여 조금 울고 싶어졌다. 여전히 이맘때마다 반복되는 일렁임의 이유를 모르겠다.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으니 무언가를 계속 쓰고 싶다가도 다시는 쓰고 싶지 않은 마음이 동시에 밀려든다. 아주 그리운 사람을 만난 듯 안심되고 반가우면서도 그냥 마음 한편에 묻어둬야 했나 싶은 두려움도 함께 느껴진다.
# 매년 새로운 여름이 시작되고 있다. 작년의 나는 여름의 끝자락에 서서 겹겹의 여름들 위로 어떤 시간을 쌓아 올리며 사실 그땐 여름이었다고 말할 때 너무 아프지 않도록 남은 여름을 성실하게 잘 채워야겠다,라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올해의 나는 여름의 끝자락에서 어떤 다짐을 하게 될까. 그 겹겹의 여름들 사이에 담긴 이야기들이 무언지 알 수 있을까. 미처 이어가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올여름엔 이어갈 수 있을까. 그리하여 너무나 많은 여름들 사이로 꼬깃꼬깃 접어 넣을 수 있는 순간들이 있을까. 어찌 되었든 두려움보단 기대감이 여러모로 나을 테니 몸속 깊은 곳으로 들숨을 밀어 넣으며 여름 속으로 잠겨본다.
# 지난 겨울부터 수영에 빠져 있는 중이라 나는 이제 헤엄을 제법 잘 치며 물살 타는 법을 조금씩 깨우치고 있다. 어쩌면 올여름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