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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너무 하기 싫은 일

by 날아라빌리

학교 선생님 중 한 명이 행정실로 전화를 걸어 너무너무 하기 싫은데,라고 했다. 이런 내밀한 마음의 소리를 입 밖으로 내는 사람이 있다니. 깜짝 놀라 3초쯤 당황하다가 너무너무 하기 싫어도 하셔야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너무너무 귀찮은데,라고 했다. 이 엉성한 라임은 도대체 뭐지? 쇼미더머니 배틀 같은 건가? 앞에서 이미 놀랐기 때문에 이번엔 바로 대답했다. 너무너무 귀찮아도 하셔야지요. 하셔야 합니다.

전화를 끊고 가만히 대화를 복기하다가 깨달았다. 앗! 그러고 보니 그 선생님, 나한테 온통 반말이었네.

매번 이렇게 반말이다. 한 번만 더 나한테 반말을 하면 야자타임을 청하는 것이 분명하니 다음에는 꼭 정성을 다해 응해줘야지,라고 다짐했었는데 너무너무 하기 싫은데에 깜짝 놀라서 반말로 답하는 걸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뿔싸.

너무너무 하기 싫어도 해. 너무너무 귀찮아도 해. 쇼미더머니에 나오는 래퍼들처럼 어깨춤을 덩실거리며 삿대질과 함께 반말로 소리쳐야 했는데 그러질 못 해 약간 분했다.

언제나처럼 우주의 허무와 무기력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채 발음을 잔뜩 뭉개어가며 간신히 소리라는 것을 내고 있는 듯 했다. 길게 발성할 힘이 없어 짧게 반말로 하나 싶기도 하다. 그 사람이 내는 소리도, 그 소리에 담긴 내용도 전부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언젠가는 이걸 반드시 소설 속의 한 장면으로 써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노트에 너무너무 하기 싫은데, 로 시작되는 장면을 메모하면서 '반드시 반말로 심드렁하게 답변할 것'이라고 덧붙여 썼다. 특별히 커다란 별표도 그려 넣었다.


추경요구서를 꼭 제출해야 하는 거냐,라고 묻길래 요구사항을 제출해야 반영 여부를 검토한다고 했더니 너무너무 하기 싫은데, 너무너무 귀찮은데, 나 그런 거 하는 사람 아닌데,라는 답변이 돌아온 것이었다. 너무너무 하기 싫은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 선생님은 교내 환경 관련 업무 담당이었는데 청소용품으로 다른 선생님들이 뭐가 필요한 지 조사하기 귀찮으니 그냥 가라로(가짜로) 대충 금액만 써 놓고 싶다, 나머진 행정실에서 알아서 하라고 하셨다. 역시나, 나 그런 거 하는 사람 아닌데,라고 하셔서 내 앞자리 주임님은 그날 오전 내내 뒷목을 잡아야 했다.

오후엔 교감선생님께서 전화를 걸어오셨다. 그 선생님과 다른 선생님 사이에 갈등이 좀 있는 거 같은데 예산 문제가 해결 안 된 건지 여쭈셨다. 예산과는 전혀 관계없고 그냥 그 선생님이 하시기에 조금 곤란한 부분이 있는 거 같습니다.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라고 전화를 끊었다. 교감선생님도 힘들어하는 사람인데 난 오죽하겠냐, 네 말도 안 듣는데 내 말 듣겠냐, 소리까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여긴 사무실이고 난 쇼미더머니 출연진이 아니니까. 아직은 내가 내는 소리가 '말'의 범주에 들고 싶으니까.


이 조직에(조직이라는 단어를 쓰는 걸 보니 나도 슬슬 꼰대 반열에 들어섰나 보다) 10년 넘게 있다 보니 '나 그런 거 하는 사람 아닌데' 소리를 여기저기서 꽤 많이 들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얄팍한 권위 의식과 은근한 무시, 애틋한 자기 연민도 이제는 그냥 못 본 척하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유사품으로 '나 그런 거 하려고 여기 들어온 거 아닌데'라는 말도 있는데, 처음에는 '그럼 나가든지'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정말 고개만 끄덕인다.

선생님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학교라는 조직 안에 워낙 다양한 직종들이 있다 보니 무슨 질량 보존의 법칙이 불변의 진리라도 되는 것 마냥 여기저기에 반드시 '그들'이 존재한다. 어쩌면 하나 같이 나 그런 거 하는 사람 아니다, 나 그런 거 하려고 들어온 거 아니다,라고 할까. 주로 '그런 거'가 업무 분장에 있거나, 업무 분장에 없더라도 내팽개쳐진 '그런 거'를 주워다가 해야만 하는 처지에 있다 보니 가끔은 '그런 거'가 좀 짠하다. 쟤는 뭐 이름이 없나. 맨날 '그런 거' 따위로만 불린다. 때로는 조금 욱! 하기도 해서 주먹 꼭 쥐고 부르르 떨다가 기필코 한마디 하고 싶어지기도 하는데, 어쩌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어디선가는 어떠한 질량을 묵묵히 지켜내고 있는 존재일 지도 모르니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다. 그래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다들 어련하시겠어요. (어깨 으쓱)


그럴 땐 그저, 나도 모르게 꿋꿋하게 지켜내며 보존하고 있는 나만의 어떤 질량을 떠올리면서 언젠가는 기세를 펼칠지도 모를 나의 똘끼를 상상한다. 지금은 네가 좀 똘아이 같긴 한데 기다려봐, 곧 내가 똘아이가 되어서 널 기함하게 해 줄게. 기대해도 좋아.

언젠가 돌아올 나의 차례를 묵묵히 기다리며 우주의 질서를 수호하는 작은 별이라도 된 듯 밤하늘 속으로 가만히 가라앉는 것이다.


어쨌든 그 너무너무 하기 싫은데 소리가 꽤나 인상적이었는지 지난 주말엔 내내 그 말을 생각했다. 자꾸만 생각하다 보니 조금 귀여웠다. 사실은, 나도, 너무너무 하기가 싫다. 주변엔 온통 그런 일들 뿐이다. 대출금이 줄어드는 속도보다 카드값이 늘어나는 속도가 더 빠른 것 같지만 무슨 일인지 살피기 귀찮다. 거울은 보니 턱 주변이 자꾸만 쳐지고 있어 방학숙제를 몰아서 하듯 뷰티디바이스를 꺼내어 얼굴라인을 쪼개고 싶은데 역시나 만사가 귀찮다. 올해는 꼭 소설을 완성해야지, 결심하고 있지만 여전히 원고지 113페이지에서 더 쓰지 못한 채 한 달이 훌쩍 넘어가고 있다. 이 걸 다 쓰기 전까진 그 무엇도 쓰지 말아야지 다짐했지만 어차피 모든 것이 너무너무 귀찮고 너무너무 하기 싫으니 아무렴 어떠냐 싶다.

밥 하는 것도 너무너무 귀찮고, 새벽에 수영장 가는 것도 너무너무 귀찮다. 우리 아들 학교의 학부모 총회도 가기 싫고,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학부모 총회도 도대체 나랑 뭔 상관이냐 싶다.

그렇게 아래로, 아래로...... 아득한 저 아래로... 깊이 가라앉아 너무너무 하기 싫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그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너무너무 하찮아서 웃음이 피식 나왔다. 어떤 것들은 너무 하찮아서 좀 슬픈데, 이런 하찮음은 역시나 좀 귀엽다. 너무너무 하기 싫고 너무너무 귀찮은 것들이 고작 이거라니. 그 하찮음과 사소함에 이번엔 제대로 안도하고 만다. 겨우 이까짓 것.

어차피 하찮은 거 전문이잖니, 할 수 있지 않을까.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난 '쫌' 잘 할 것 같은데!?

근거 없는 성급한 결론을 손에 쥐고선 느닷없이 의욕에 가득 차버린 스스로가 조금 어이없는 어느 봄날의 시작이다.


+ 그러니까 이 글은 원고지 113페이지 분량의 글 위에 커서를 두고선 너무 너무 귀찮고 너무 너무 하기 싫은 이 상태를 극복하기 위함이다. 도무지 써지지 않는 글만큼 귀찮고 하기 싫은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안 되는 건 때려치우고 차라리 그냥 '너무 너무 하기 싫은데'를 써볼까. 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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