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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벌레 소리에 잠긴 아침

by 날아라빌리

+ 새벽에 비 내리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멍하니 거실에 앉아서 복숭아를 먹다가 이건 올여름 마지막 딱복이려나, 딱복을 얼마나 더 먹을 수 있을까, 딱복이 아니면 황도라도 먹고 싶은데,라는 생각들을 했다. 나는 확신의 딱복파였는데 무슨 영문인지 올여름엔 맛있는 딱복을 만나기가 힘들었고, 과일 가게 앞을 서성이다가 우연히 집어든 황도가 꽤 맛있었기에 딱복이 안 된다면 황도도 썩 괜찮지,라는 생각을 하며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비가 그쳐 있었다. 잦아든 빗소리 대신 풀 벌레 소리가 짙게 들려와 이 맘 때의 어느 이른 아침처럼 풀벌레 소리에 잠긴 듯한 기분이었다.

이 기분은 일 년 중 딱 이맘때만 느낄 수 있다. 여름이 물러서고 가을이 다가오는 딱 이 즈음.

괜히 서럽고 조금은 쓸쓸해지는 그런 때.


다행히 오늘 아침의 딱복은 맛있었다. 좀 더 오래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글을 꾸준히 쓴다는 건 어떤 삶일까. 쓰는 사람이란. 쓰는 삶이란. 내게는 그저 막연한 것들.

어떻게 꾸준히 쓸 수가 있지? 간간이 쓸 수는 있겠지만 꾸준히 쓴다는 건 어쩌면 일종의 신념이 아닐까.

지난봄에 소설을 썼는데 너무 구렸다. 독자라곤 나 하나뿐인데 나조차 읽기 싫으니 이걸 어쩜 좋나. 조금이라도 흡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게 수정하려고 했는데 살짝 바빴고, 여름이 시작할 무렵부턴 살짝 아팠다.(......라는 건 핑계)

브런치북 수상 작품을 돈 주고 산건 이 책이 처음이다. 이건 이렇게 가벼운 내용이 아닌데? 원래 제목이 더 좋았는데? 하며 엄청나게 아쉬워하다가, 브런치에서 보던 글보다 훨씬 내용이 풍성하여 즐겁게 읽었다. 이 책을 보면서, 하나의 줄기를 가진 글들이 이렇게 유기적으로 엮어져 다시 하나의 글처럼 보여야만 하구나, 깨달았다. 내 글은 왜 안 되는지도 알았지만, 안다고 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니 그게 문제다.

아... 소설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정하지? 이것만큼은 내 맘에 좀 들었으면 좋겠다.


+ 봄이 끝나갈 무렵부터 숨이 잘 안 쉬어졌다. 봄에 조금 바빴는데 면역력이 떨어졌는지 감기를 꽤 오래 앓았고 살만해졌다 싶을 때 프리다이빙 특강을 들었는데 그때 뭔가 너무 힘들었다. 나는 (아마도) 모태 프렌젤이라, 덕다이빙 자세가 매우 치명적으로 꼴 사나울 뿐 이퀄라이징도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에도 어려움이 없었는데, 그날은 이상했다. 10미터 이상 내려갔다간 죽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감기를 오래 앓아서 그런가, 하며 억지로 꾸역꾸역 내려가다가 다시 꼬르륵 거리며 올라오길 몇 차례 반복했다. 그즈음부터 숨이 잘 안 쉬어지길래 아마도 그날 폐를 다쳤구나, 생각했다. 수영조차 점점 힘들어지길래 아이고, 정말로 어딘가에 문제가 생겼구나 싶었다.

그게, 그건 줄도 모르고...... 이런저런 검사를 꽤 했더랬다.


+ 평균 조회수가 대체로 0인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이것도 운영이라고 할 수 있나 싶지만, 가끔 무언가를 기록하긴 한다. 1년에 한두 번 기록할 때도 있고, 10번 넘게 할 때도 있는데, 그 묵직한 0을 보고 있자면 마치 그곳이 비밀 일기장 같아서 의사 선생님과의 상담일지를 기록하기로 결심했다. 처음 한 두 번은 잘 썼는데, 역시나 꾸준함이 없는 것인지, 상담하고 온 날은 뭔가 기가 빨려서 그런지, 딱히 마주하고 싶은 기록이 아니라 그런지, 다시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고 있다.

단정한 얼굴로 의사 가운도 입지 않은 채 다 털어놓아도 괜찮아요,라는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 아래에선 반바지 차림이라 '뭐야? 너무 편하게 일하는 거 아녀?' 하며 혼자 살짝 비웃었던 것만 기억에 남고 진료 때 나누었던 대화들은 점점 옅어져 간다. 당시의 내 기분들도 점점 흐려지고 있다.

이 기억들이 앞으로의 내 삶에서 꽤나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대로 옅어지게 두면 안된다는 조바심과,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생각에 그냥 내둬버리고 싶은 귀찮음이 교차하는 중이다.


+ 도대체 발리에 뭐가 있길래 다들 발리, 발리 하는 건지 궁금해하다가, 결국 발리 항공권을 결재했다. 수요일 밤비행기로 떠나서 그다음 주 목요일 새벽에 돌아온다. 계획했던 일정보단 짧아졌지만 출발과 도착이 그 날짜여야 항공권이 저렴했다. 수하물을 포함한 직항인데 38만 원. 추석 연휴가 지난 후라 가격이 떨어진 듯 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거의 14년 만에 처음인데 잘할 수 있을까?

내가 그 변수들과 혼잡함을 잘 버텨낼 수 있을까.

의사 선생님은 이전의 나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하셨다. 어느 이전이요? 14년 전, 혼자 유럽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배짱과 여유가 있던 그때의 나요? 숨이 잘 쉬어지던 그때의 나요? 어느 이전의 나인지, 선택할 수 있나요?


+ 그러니까, 여름이었고... 여름이었다.

또 이렇게 풀벌레 소리와 함께 여름의 시간들이 한 겹 한 겹 쌓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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