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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을 맞이할 준비

by 날아라빌리

8년 동안 썼던 일기장이 있다. 3년 일기, 5년 일기. 뭐 이런 식의 특별한 컨셉을 지닌 일기장은 아니고 그냥 일반 줄노트인데 워낙에 드문드문 썼더니 8년이나 썼는데도 반도 못 썼다. 손때가 잔뜩 묻은 표지는 모서리가 떨어져 너덜거린다. 세월이 흔적이 여기저기 묻어 있어 얼핏 보면 꽤나 다정한 비밀과 오래된 추억들이 담긴 듯도 하다.


그렇지만, 어쩌다 보니 일기장엔 주로 남편 험담을 쓴다. 가끔은 제법 센 욕을 쓰기도 한다. 남편한테 설레었다는 내용도 있긴 한데 사실 그건 아주, 아주, 아주 드물게 있을 뿐이다. 가령, 얼마 전 남편이 상갓집을 가느라 까만 양복을 입었던 날. 평상시와는 다른 모습이라 조금 설렌다는 둥 뭔가 나만의 포인트로 남편이 맘에 쏙 드는 날에만 험담이 아닌 정상적인(?) 일기를 쓰는데 사실 그런 날은 일기장을 펴기보단 그저 남편 등에 매달리기에 역시나 남편 험담을 할 때만 일기장을 펴고 있는 것 같다.

아직 꽤 많은 페이지가 남아 있는데 이미 8년을 썼고 9년째 쓰려니 좀 질려서, 게다가 이렇게나 많은 험담을 늘어놓는데도 우리 남편은 딱히 변하지 않았고 내가 쓰고 있는 것들에 별관심도 없어서(식탁에 앉아 보란 듯이 씩씩거리며 쓰고 있건만) 심통 가득한 이 일기를 그만 쓸 때가 온 건가, 하던 중이었다.


그날도 8년 치의 험담이 담긴 낡은 일기장을 손에 쥐고선 내년에도 이걸 계속 써야 할까를 고민하며 2024년의 남은 날짜를 헤아렸다. 달력을 들여다보다가 우연히 옆에 있는 거울에까지 시선이 닿았는데, 새치 염색한 지 꽤 지난 것인지 여기저기에서 올라온 흰머리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깜짝 놀라 남편을 향해 외쳤다.

"앗! 나 새치 염색 좀......"


남편은 아직 새치가 별로 없는데 나 혼자만 진작부터 이랬다. 이제는 새치라고도 할 수 없는 것들이 머리 위로 새하얗게 내려앉은 지 꽤 되었다. 늘 남편이 염색을 해주는데 처음엔 부분 염색이었다가 이제는 점점 그 범위가 넓어지고 있어 이렇게 부탁할 때마다 매번 조금씩, 또 조금씩, 더 머쓱해진다. 그래서 그럴 때만 누나 타령을 한다.

"누나가 말이야, 네가 하도 속을 섞여서 이렇게 먼저 늙어버렸잖아. 염색도 꼬박꼬박 잘해주고, 나중에 병수발도 잘 들어야 해. 이건 전부 너 탓이라고!!"

남편은 늘 별말이 없는데 혼자서만 괜스레 말이 많다. 그러다가 가만히 좀 있으라는 잔소리를 듣곤 한다. 말 잘 듣는 어린아이라도 된 듯, 새치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만 같은 앳된 표정을 (억지로) 지어 보이며, "네에-" 대답한다. 남편이 머리 위에 염색약을 잘 바를 수 있도록 자세를 고정하고선 2025년엔 이 일기장을 그만 써야겠구나 다짐했다. 앞으로 내내 새치 염색도 해줄 테고 병수발도 들어줄 텐데 욕은 이제 그만해야지. 아무렴.


올해부턴 아예 5년 일기장을 준비했다. 그날의 할 일들과 주간 계획을 간단히 메모할 수 있는 노트를 준비하면서 일기는 어차피 띄엄띄엄 생각나면 쓸 테니 그냥 5년 일기장을 쓰면서 같은 하루라도 해마다 달라지는 모양새를 조금씩 쌓아 가보자 싶었다. 더 이상 남편 욕은 하지 않기로 다짐했지만, 그건 사실 잘 모르겠다. 새치 염색해 줄 때만 살짝 이뻐서. 흥!


어쨌든, 8년 동안 쓴 일기장 속엔 온통 남편 이야기라서, 결국 제대로 쓰고 싶은 것도 남편 이야기라서, 사랑이든 (얄)미움이든 내 안에 가득 차 있는 이야기는 대부분 남편이라서, 3월부턴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새롭게 써봐야겠다고 생각 중이다. 어째서 3월이냐면, 그건 그냥 내 취향으로,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기엔 한 계절이 접히고 한 계절이 다가올 때가 맘에 들어서 그렇다.


요즘 들어 부쩍 보통의 날들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던 보통의 하루. 조금 지루한 일들도 기어이 해 내고 가벼운 맘으로 퇴근하는 길의 소중함. 특별할 것 없이 평상시 즐기던 것을 오늘도 먹고 마시다가 문득 바람의 온도와 햇살의 밀도가 바뀌었음을 느끼는 순간.

그냥 그렇게 지나쳐가는 하루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글을 써볼까, 하는 생각도 한다. 나 혼자 산다는 아니지만, 나 혼자 산다처럼 그렇게. 이것도 역시나 3월부터.


아직은 겨울이고 여전히 2024년이 이어지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바람의 방향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지만, 그래도 9년 만에 일기장을 바꾸니 확실히 기분이 좋다.

2025년에는 꾸역꾸역 이어지는 일상을 바라보면서 그 '꾸역꾸역'이 지닌 성실함을 소중히 여기며 많이 감사할 줄 아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은 남편이 새치 염색을 해줬는데 얼룩덜룩해서 살짝 화났다, 라든지. 어제는 수영장에서 1700m나 수영을 했는데 저녁엔 오히려 몸무게가 늘어나 있어 어처구니없었다, 라든지. 아들이 일기장에 엄마는 책을 안 읽는다고 화만 내었는데 아빠가 왜 읽어야 하는지 차분히 설명해 줘서 좋았다고 써놨던데 너무 억울했다, 정도의, 그저 그런 보통의 날들이 무던하게 이어지는 한 해가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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