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그러니까 꽤 오래 전의 어느 한 시절에, 내 연인은 300년 전 모나코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했다. 이번 생의 나는 대한민국에 태어나 오래전 모나코에서 죽은 연인의 환생을 기다리는 중인데, 아쉽게도 이번 생도 텄구나, 뭐 대충 그런 상상. 아주 진지하게 했던 생각은 아니고 '이대로라면 결혼은 못 하겠구나.'라는 투덜거림보단 '아, 모나코에서 300년 전에 헤어진 연인을 이번 생에도 못 만나겠구나. 다음 생을 기약하며 살아야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낭만적인 듯하여 그리 했던 것이다.
이 생각은 어느 미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섹스앤더시티라고 당시 꽤나 유행하던 드라마가 있었는데 시즌 4의 '아이러브뉴욕'이라는 제목의 에피소드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여름이 멀어져 가고 가을이 다가올 무렵의 어느 밤에 괜스레 잠들지 못한 캐리(여주인공)가 빅(캐리의 썸남이랄까)에게 전화를 건다.
"지금 뭐 해?" 캐리가 묻는다.
"오, 내가 생각하는 사람 맞아?" 빅이 대답한다.
"누굴 생각했는데?"
"모나코 왕비"
"그 여잔 죽었어."
"그래서 놀랐다는 거지."
별 거 아닌 이 장면이 어찌나 좋던지. 딱 그런 온도를 지닌 계절에 되어 그에 어울리는 바람이 불 때면 모나코에 두고 온 연인을 그리워하듯 한없이 누군가를 그리워하곤 했다. 아마도 그런 감정들은 외로움이나 쓸쓸함 같은 거였겠지. 저런 티키타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아니, 주고받는 것까진 아니라도 저 대화 속에 담긴 설렘과 그 배경이 되어준 계절의 온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만나 '혹시, 너니?' 했다가도 알면 알 수록 내가 기다리던 그 사람은 아니었기에 30살이 넘어가면서부턴 조금씩 체념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내게 오지 않은 너 때문에 올해도 나의 여름은 온통 고추장아찌 같아. 모나코에서 죽은 연인을 다시 만나려고 태어난 건데 삶이 맵고 짜고 쭈굴쭈굴하기만 하니, 맙소사! 이번 생도 텄구나, 싶었다.
그러다가 33살의 여름에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남편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지만(눼에?) 나는 '어?' 했었다.
저기...... 우리, 300년 전쯤에 마주쳤던 거 같지 않아? 내 생각엔 우리가 모나코에서 만났던 거 같은데 말이야.
언제나 고추장아찌 같기만 했던 여름이 진짜 여름이 되어가는 듯했다. 물론, 남편 역시 그 장아찌만큼이나 만만치 않은 상대였기에 조금쯤은 여전히 고추장아찌 같았지만 모나코에서 헤어졌던 연인을 300년이나 기다려 겨우 만났으니 이 정도는 해야지, 했다. 여름이면 아직도 여름 하늘 아래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너는 300년 동안 뭘 하다가 이제야 나타난 걸까' 궁금해했고, 여름이 끝날 때면 '300년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여름 하늘 아래에 있을까.' 궁금해했다.
이런 모양의 마음과 이런 바람을 지닌 시선을 두고 흔히들 사랑이라 부르는 걸까. 그러기엔 내 마음은 좀 복잡한데, 원래 사랑이 그런가? 300년 전의 나는 어땠을까.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를 믿고 위하는 마음의 이면에 그를 향한 불신과 불안 같은 것들이 함께 이어져 있어 그 모순된 감정들이 결국 한 가지 마음이라는 사실이 아직도 의아하다. 불안이라는 감정이 너무도 싫어서 가능한 외부 자극을 줄이며 살고 싶어 하는 나인데, 남편은 내게 가장 큰 불확실함과 수많은 머뭇거림을 던져주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편에게 우리는 300년 전에도 만났고 300년 후에도 또 만날 거야,라는 농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그러다가 불쑥 솟아나는 불안을 이기지 못하여 남편을 괴롭히기도 한다. 정말로 이런 괴팍함이 사랑인가. 사랑은... 어쨌든 핑크핑크하고 좀 예쁘고 뽀샤시한 뭐 그런 거 아닌가.
남편의 주식 때문에 몇 년 동안 꽤 많은 대출을 받았다. 우리 둘 다 커다란 빚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모두들 자기 집의 절반은 은행 거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는데, 우리 집이야 말로 온전히 은행 것이다. 아, 어쩌면 이제 현관 안으로 한 걸음 정도는 우리 건가. 아직 그 정도는 아닌가. 여전히 이런 셈은 살짝 서글프고 조금 어렵다.
이제는 남편과 함께 이혼숙려 캠프 같은 방송을 보면서도 "차암내, 우리도 같이 사는데..." 이러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꽤나 힘겨운 나날을 보내었다. 어제는 사네마네 했다가 오늘은 끌어안고 울다가, 다음날이면 꼴도 보기 싫어하길 반복했다. 혼란스럽고, 혼란스럽고, 혼란스러웠던 날들이었다. 그러니, 내게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내가 어처구니없었던 만큼 남편도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간신히 그 세월을 넘겼고, 이제 현관 한두 걸음 정도는 우리 건가? 하며 한숨을 돌리던 중이었는데, 이제 와서 왜? 느닷없이 왜? 진짜 왜? 싶었겠지. 올여름은 그렇게 각자의 물음표를 품고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누군가는 맹수처럼 짖어대었고 누군가는 끊임없이 달래야만 했던 여름이었다.
며칠 전에 남편에게 불쑥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미안.
뭐가?
그냥... 빨리 병원 갈걸. 괜히 가족들 괴롭히고 매일매일 화내고 해서...... 미안.
그럴 수 있지. 괜찮아.
그리고, 그때... 옛날에... 때려서 미안.
소파에 드러누워 티비를 보던 중이라 나와 티비를 번갈아 보던 눈빛이 깜짝 놀라며 내게 고정되었다.
그때 미안해. 아팠겠다, 미안해.
내가 한번 더 미안하다고 말하자 남편은 제대로 고장 난 듯했다. O형인 내 남편은 세상 대부분의 일 앞에서 허허허 웃으며 그러려니~하는데,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엔 고장이 나버려 버벅거린다. 세상 멍텅구리 같은 그 표정을 보니 몹시도 안심이 되었다. 되게 못 생겼네, 생각하며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곤 저녁 준비를 하러 갔다.
공황장애는 약이 꽤 잘 듣는다. 약만 잘 챙겨 먹으면 호흡이 안정적으로 잘 잡힌다. 편안해진 호흡 덕분인지, 나는 최근 몇 년 중 가장 편안한 심리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지금의 나라면 AB형계의 성골 자리를 내어줘야 할지도 모른다.
못내 아쉬운 마음에 소박한 바람을 말해보자면, 다음 생에도 초특급 AB형이었으면 좋겠다. 남편과는 다음 생에도 또 만날 생각인데 그때는 내가 남편의 속을 꽤나 많이 썩일까 한다. 지금부터 열심히 이것저것 연구하며 벼르고 있는 중이다. 천하의 망나니로 환생하여 AB형력을 최대치로 뿜어내며 남편의 속을 뒤집고 휘저으며 아주 그냥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괴롭힐 계획인데, 그때도 우리 남편은 여전히 초특급 O형이어서 그런 나를 보면서도 평안하길... 부디 무탈한 호흡을 이어가며 그러려니, 하길.... '저 인간이 오늘 컨디션이 특히나 좋아서 유난히 파이팅 중이구먼' 정도로만 생각했으면 좋겠다. 내가 마음이 약해질 수도 있으니, 나처럼 이런 식으론 아프지 말고 O형답게 무던하게 바라보길. 정말이지 아프진 말길. 나도 최선을 다할 테니 남편도 최선을 다하길.
우리 둘 다 다음 생에도 파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