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려니' 연습하기

by 날아라빌리

남편이 내 여행에 동의하기 전 망설였던 것은 나의 공황장애였다. 눈빛을 보니 아무리 말려도 어떻게든 갈 것 같은데 정말 괜찮을까.

"진짜로 혼자 괜찮겠어? 혼자 있다가 또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

"괜찮아. 그래봤자, 나는 공황 초기야. 공황인들 사이에선 이건 취급도 못 받아. 아기야, 아기. 그리고, 숨이 잘 안 쉬어져도 절대 안 죽는다는 건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어서 불안하지 않아. 진짜로 내가 알아서 잘 대처할 수 있어. 위험한 곳은 절대 안 갈 건데, 혹시나 해서 길리섬에서 숙소는 한인이 운영하는 곳으로 가. 사장님이 한국사람이래. 다이빙은 나보다 레벨이 높은 사람을 카페에서 일행으로 구해놨어. 그래도 여차하면 내가 알아서 바다엔 안 들어갈 거야. 나 그 정도는 판단할 수 있어."

남편을 안심시키기 위해 준비한 말들을 녹음기 버튼을 눌러 재생시키듯 늘어놓았다.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만, 그래도 위험한 일이 없도록 해야 해,라고 했다. 평소의 남편이라면 그런 말조차 하지 않겠지만 꽤나 걱정이 된 모양이다. 몇 번이나 녹음기 버튼을 누른 후에야 남편의 동의를 받아낼 수 있었다. 어쨌든, 남편은 확실히 이런 타입이다.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러려니~하며 지켜본다.

나는 언제나 남편의 '그러려니'를 조금 한심하게 여기는 편이었다. 스스로에게 관대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일종의 무책임함과 방관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마음속에도 불안과 걱정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그저 더 큰 믿음을 지닌 채 불안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었다.


만약, 남편에게 나와 같은 증상이 있었고 혼자 여행을 가겠다고 했다면, 나는 극구 반대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못 가게 말렸을 것이다. 정 가고 싶으면 내가 같이 갈 수 있을 때 나랑 같이 가자고, 죽어도 혼자서는 못 보낸다고 했을 것이 뻔하다. 문득 궁금했다. 나를 보내줘서 고맙긴 한데, 왜 보내주지? 어떻게 나를 보내줄 수가 있지?

남편한테 물었다.

"안 불안해?"

"당연히 불안하지. 그렇지만 네가 꼭 가겠다고 하니까, 이제는 믿어야지."

남편의 눈빛은 고요했다. 그 속엔 그동안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여러 감정들이 가득했다.

너는... 정말로 나랑은 참 다른 사람이구나, 생각하면서 다짐했다. 힘들겠지만, 너를 조금은 닮아보겠다고.


그리하여, 발리로 떠나면서부터 '그러려니' 연습이 시작되었다. 나는 조금씩 '그러려니'를 연습하고 있다.


1. 그러나, 내겐 너무 터프한 세상

Tirta yoga inn, 1박 250k

발리엔 거의 자정에 도착한다. 새벽에 체크인했다가 잠시 눈만 붙이고 아침 일찍 길리로 가는 배를 탈 계획이라 1박에 2만 원 정도의 숙소를 예약했다. 아고다와 구글 후기를 보니 가격 말고는 특별한 장점이 없는 곳이라는 평이 많았지만, 그 가격이 2만 원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건 모든 것을 극뽁! 할 수 있는 초특급 장점이다. 항구에서 가깝고 친절하지만 낡고 더러운 이불은 아무래도 사람이 덮는 용도는 아닌 거 같다는 후기에 살짝 쫄긴 했지만, 2만 원이라면 극뽁! 해야만 한다. 평소 나의 유난을 아는 남편이 괜찮겠냐고 몇 번을 물었지만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내가 이제 조금씩 그러려니를 배워볼까 싶어. 기안84의 여행을 보면서 진정성을 느꼈단 말이지. 바퀴가 있다고 한들 설마 그 바퀴가 침대 위까진 올라오진 않겠지."


그런데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침대 위의 누군가를 발견했다. 너무 커서 뭔가 사람 같았다. 좀 비켜달라고 하면 "쏘리"라고 대답할 것만 같은... 그런 기운, 그런 존재감. 아.... 그래, 뭐 너도 숙박비 내렴, 후훗. 괜찮은 척 어깨 으쓱. 가져간 살충제를 잔뜩 뿌리고(그러려니를 연습하기로 했지만 일단 살충제는 챙겼다) 샤워를 하러 욕실에 갔다가... 상황을 보아하니 어쩌면 안 씻는 것이 더 깨끗할 듯하여 뒤걸음질 쳤다.

고대 유물인 줄

가져간 수건을(이런 거 챙기느라 옷도 별로 없는데 무게가 꽉 찼나 보다) 베개 위에 깔고 누웠다. 살충제 때문에 뭔가 등이 축축했다. 아아아아아, 그러려니의 세상은 역시 쉽지 않구나.

잠을 자긴 텄다 싶어 멍하니 누워 있는데.... 세상에... 벽에 커다란 도마뱀이 보였다가 커튼 뒤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 방에 도대체 나 말고 몇 명이나 더 있는 걸까 궁금해다가 너무 피곤하여 결국 잠들고 말았다. 예민보스인 내가 이제 막 '그러려니'의 세상에 첫 발을 들여놓았는데 지나치게 터프한 거 아닌가. 거참 자비 따윈 없구먼. 이 와중에 졸리긴 하네. 아~함.


+ 다음에도 2만 원이라면, 여기서 1박 정도는 한번 더 가능할 듯


2. 나를 우주로 보내려는 걸까.

요가반 'shamanic breathwork journey'

우붓에 가기 전에 가장 기대했던 수업은 요가반의 'shamanic breathwork journey'이었다. 그냥 제목 그대로 샤머니즘 호흡 여행 같은 거라 생각했다. 점 보는 거 재밌어하니까 샤머니즘 OK, 호흡 관련은 지금 나한테 무조건 필요하니까 그것도 OK, 여정은 뭐 명상 같은 걸 의미하는 걸까? 그렇다면 완전 OK. 샤머니즘을 곁들인 호흡 명상 같아서 이 수업은 무조건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내 영어 수준이 초딩보다 못 한 수준이라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꽤나 길고 비싼 수업이었기에(보통 요가 수업은 165k인데 이건 600k였다. 5만 원이 넘는다.) 접수하면서 물어봤다.

나 영어 못 하는데 이 수업 가능할까? 수업이 3시간이나 되던데?

응, 네가 몇 개의 단어만 알아들으면 가능해. 모르면 그냥 옆 사람 따라 하면 돼. 요가 수업 때도 다들 그렇게 하잖아.

하긴 그러네. 들이마시고 내쉬고. 나 이건 잘 알아. 우주도 알고 평화도 알고 에고도 알지. 네 말대로 대충 옆 사람 따라 하면서 해볼게.


그렇지만, '몇 개의 단어만 알면'은 순전히 뻥이었다. 이 수업은 자기소개부터 시작하여 이 수업에 참가한 동기를 서로 이야기해야 했고, 명상 후에는 그 순간의 감정을 공유하기 위해 그림을 그려 설명하며 명상의 순간에 대한 경험 발표까지 해야 했다. 수업 진행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내가 맞게 이해했다면) 잘못 들은 건 줄 알았다. 접수처 여직원 멱살을 잡으러 뛰쳐나가고 싶었다. 가능하다며? 기껏해야 우주, 하모니, 에고, 평화 이런 것밖에 못 알아듣는데, 나한테 지금 영어로 뭘 하라고?

나는 한국말로 자기 소개하는 것도 싫어한다규~ 힐링 캠프 같은 데에 우르르 모여 앉아 다 같이 울고 불고 하는 건 생각만 해도 기 빨려. 게다가 너네 잘 모르나 본데, 나는 공황장애라고. 너네 공황장애 알아? 쉬바(1). 공황인한테 이러기 있어?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영어를 못해서, 개뿔 못 알아들어서, 그리고 돈도 많이 아까워서(나의 용종이랑 바꾼 돈인데 ㅠㅠ)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간신히 자기소개가 끝나고 내가 왜 여기 왔는지 더듬거리며 말한 다음, 강사님이 아주 긴~~~ 말을 했는데 그건 진짜 '하나도' 못 알아들은 채 명상이 시작되었다.

좋아, 나 녀석, 기특해. 방금 순간들은 아주 잘 극뽁!했어. 말만 안 시키면 이제 괜찮아. 나 혼자 좋은 생각을 하면서 명상을 해야지. 스스로를 굉장히 칭찬해 줬다. 너무 당황해서 호흡 곤란이 올 뻔도 했지만, 휴우- 무사히 극뽁!


눈을 감은 채 누워서 명상을 시작했는데 느닷없이 강사님께서 피리를 불고 북을 치기 시작했다. 아, 맞다, 샤머니즘. 사람들이 부스럭거리며 움직이는 소리도 조금씩 들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아까 내가 못 알아들었던 말 중에 뭐가 있었던 거지? 궁금해서 눈을 뜨고 싶지만, 또 한편으론 눈을 뜨고 싶지 않다. 아니, 그냥 여기 누워 있기 싫다. 쉬바(2).

난 그저 살짝 홀리홀리한 분위기를 기대하며 이 수업에 참여한 것인데, 무슨 부족 의식이라도 치르는 듯 우가차차 우가차차~ 하는 듯한 음악이 흐르면서 주변에선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고 공기도 살짝 끈적해진 듯하여 내 눈썹이 나도 모르게 자꾸만 꿈틀거렸다. 아, 뭔가 분위기가 점점 요상해지고 있는 듯하여 슬쩍 실눈을 떠봤더니 확실히 좀...... 음, 표현할 길이 없는데 아무튼, 좀...... 괴상했다. 이상하다는 말은 적절하지가 않고, 어떤 단어가 좋을까. 우리나라처럼 형용사가 많은 언어도 드물 텐데 대체 어떤 걸 가져다 써야 할지 모를 풍경이네, 싶었다. 아아아 이건 그냥 좀... 괴상한데?

어떤 사람은 일어나서 흐느적거리고 있었고(근데 지퍼는 왜 열고 있을까), 내 옆 사람은 누운 채 손발을 들고선 감전된 듯 부르르 떨고 있었으며, 어떤 여자는 일그러진 얼굴로 울고 있었고, 그 옆의 남자는 소리를 지르며 화내고 있었다. 얼핏 아까 선생님이 뭐든 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 모든 광경의 이유와 시작을 알아듣지 못했던 터라 다들 왜 이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 나의 용종아. 대장 내시경하며 뜯어져 나간 용종의 자리가 아려오는 듯했다. 미안해, 용종아, 내가 이러려고 여기 온 건 아닌데 말이야. 영어를 못 해서 다들 왜 이러고 있는지를 모르겠네. 영어를 알아들었으면 아마도 이러기 전에 나갔거나 나도 같이 감전된 듯 떨거나 울거나 춤추거나 했을 텐데 말이야.

별 수 없이 잤다. 그러려니를 하기 위해선 달리 할 것이 없었다. 그 와중에 잠들었던 스스로가 대견하여 잠에서 깨었을 때 기특하고 뿌듯했다.


명상이 끝나고 세 번째 시간이 되었을 땐 그림을 그려서 조금 전 명상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하라고 했다. 쉬바(3). 대충 아무렇게나 그림을 그린 다음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고백해야 했다.

나 사실 영어를 못 해. 눈을 떴더니 너네가 울거나 춤추거나 떨고 있던데, 왜 그러는지 나는 잘 몰라서 그냥 잤어. 너네 뭐 한 거야? 왜 그랬어? 음... 암튼, 나는 여기 오기 전까지 늘 누가 미웠어. 가끔은 내가 미웠고 가끔은 옆사람이 미웠고 또 가끔은 가족이 미웠어. 사랑하는데, 그래도 미웠어. 그렇지만 내가 방금 잠들었다가 깼을 때 그 마음들이 조금씩 작아지고 있는 것 같았어. 이 까만색은 잠들기 전의 나의 미움들이고, 이 푸른색은 잠에서 깬 후의 내 마음이야. 조금씩 까만색들이 작아지고 있고 내가 좋아하는 하늘과 바다 같은 푸른색이 커지고 있어.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아주 잘 잤다는 이야기야.


나는 세 살짜리처럼 더듬거리며 이런저런 단어를 늘어놓으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사실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었는데 영어가 짧아 겨우 겨우 저 이야기들을 했다. 내가 잤다고 이야기하자 강사님이 허허 웃으며 무언가를 이야기했는데 당연하게도 또 못 알아들었다.

바보야, 나 영어 못 한다고 했잖아, 천천히 좀 말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냥 웃었다. 우주, 평화, 에고, 하모니, 위아더월드. 그런 말들을 생각하며 나 스스로의 명상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전의 나라면 틀림없이 당황하여(나는 누구 앞에서 발표하는 것 자체를 미친 듯이 싫어한다) 중간에 뛰쳐나갔을지도 모르지만, 나를 우주로 보내려던 그들을 아주 잘 극복해 낸 최고의 '그러려니'였다.


+ 영어를 못 하는 것이 많이 수치스러웠던 3시간. 내년엔 꼭 스픽으로 영어공부할 거다. ㅠㅠ


3. 여전히 이유 없는 일들

발리를 다녀오고 나서 스스로의 심리 상태에 대해 꽤나 자신감이 생겼다. 자기혐오도 많이 나아진 것 같았고, 타인에 대한 거부감도 꽤 줄었으며, 남편에 대한 사랑과 미움의 기울기에 상당한 격차가 생긴 듯하였다. 일정한 방향이 생겨난 것이 틀림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안하고 차분하여 약을 좀 줄여도 될 것 같았다.


어차피 마음이 아파 생긴 일이라면 그 마음이 괜찮아지면 되는 거 아닌가.

이틀째 약을 먹지 않았을 때까진 멀쩡했다. 남편한테 소곤소곤 자랑도 했다.

"나 지금 이틀 동안 약 안 먹었는데 호흡에 아무 이상이 없다?! 전에는 하루만 빼먹어도 새벽에 깨거나 다음날 숨이 가빴거든. 지금은 완전히 너무 멀쩡해."

"오~ 진짜? 대단한데?"

남편이 칭찬해 주자 기분이 더욱 좋아져서 잔뜩 으쓱거려졌다. 내일도 약 안 먹어도 되겠는데? 싶었지만, 그날 밤에 결국 심장박동이 다시 빨라지면서 호흡이 불편해졌다.

조금 기다려봤지만 아닌 듯했다. 약봉지를 뜯어 물과 함께 약을 삼켰다. 일기장에 약을 먹지 않았던 시간과 증상을 기록했다. 그리고 몇 가지 다짐들을 함께 기록했다.

다시 호흡이 불편해져도 초조해하거나 실망하지 말자.

스스로에게 화를 내지도 말자.

그저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 일어났을 뿐이니 그냥 흐름에 맡기자.

이유를 안다고 해도 내가 막을 순 없는 일들이니 지금 이 순간의 호흡에만 매몰되지 말자.


이렇게 오늘도 '그러려니'를 연습한다. 쉽진 않지만, 어려울 것도 없다. 천천히 그러려니의 세계로 접근하면서 조금씩 연습해 보려 한다. 느리지만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나는 이제,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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