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요, 제가 공황장애로 보이나요?

by 날아라빌리

내가 다니는 병원의 건물에는 다른 병원들도 많다. 동네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작은 메디컬 센터로 산부인과, 피부과, 내과, 한의원, 치과 등 여러 병원이 층을 달리하고 있다. 1층에 입점한 스타벅스와 베스킨라빈스 사이에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그 앞에서 기다렸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재빨리 4층을 누르고 안으로 숨어들었다. 같이 엘리베이터에 탄 승객들은 다른 층에 있는 피부과나 산부인과 혹은 내과를 가겠지,라는 생각으로 안쪽 깊숙이 들어갔던 것인데 꽤나 자주 다 함께 4층에서 내렸다. 4층엔 성장과 비만 치료를 돕는 한의원, 내과, 치과 그리고 정신건강의학과가 있다. 4층 엘리베이터 문이 땡! 하고 열리는 순간, 승객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갔다. 물리적으론 '와르르'까진 아니었는데 심리적으론 뭔가 급박하고 무겁게 쏟아지듯 '와르르' 느낌이었다. 오픈런을 하는 듯한 비장함으로 같은 곳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오픈런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아주 조심스럽고 신중한 몸짓이었달까. 한의원도 있고, 내과도 있고, 치과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저어~기 안쪽에 있는 정신건강의학과를 향한 걸음들이 많았다.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조금 웅크린 듯한 뒷모습으로 새침하게 외치고 있었다.

'왜요, 제가 공황장애로 보이나요?'


사실, '모두들'은 아닐지도 모른다. 대체로 그러했고 주로 내가 그러했다는 이야기다.

건물에 들어설 때는 베스킨라빈스를 가는 척,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는 내과나 산부인과를 가는 척, 4층에서 내릴 때는 이제야 말로 내과를 가는 척하며 내과를 지나 정신건강의학과로 쏙 들어가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았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언제나 가장 큰 불만은 너무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다는 거였다.

"아니, 쫌! 그렇게 크게 부르면 누가 듣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진료를 받고 약을 먹기 시작했을 때. 한동안은 남편 외엔 누구에게도 증상을 알리지 않았다. 창피했다. 나약한 멘털로 엄살이나 부리는 무능력함으로 비치진 않을까. 일하기가 싫어서, 일하기가 힘들어서, 누군가에게 무어라도 미루고 싶어서, 사무실 책상에 앉아 울먹이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내가 그들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아 누구에게도 내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약을 먹으며 조금씩 감정이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가까운 지인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여름 내내 컨설팅을 같이 다녔던 동기에게 먼저 알렸다. 사실은... 하며 입을 뗐더니, 인사팀에서 근무할 때 많이 접했다며 의외로 꽤 많아서 공황장애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 했다.

"그래? 진짜?"

"어 언니, 생각보다 꽤 많다?"

"그래도, 어디 다른 데는 말하지 마. 엄살 부리는 거 같거든."

"응, 말 안 하지. 근데 그거 정말로 별일 아니야. 그리고, 엄살 좀 부리면 어때? 다들 부리고 살아."


조금 지나선 이전 근무지의 동료들에게도 말했다. 나를 포함하여 6명이 속해 있는 단체 카톡방이 있는데 주로 주말에 갔던 맛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날은 무슨 맛집을 이야기하고 있었더라? 모임을 위한 장소를 정하다가 또 이야기가 새어 무언가의 대존맛에 대한 토론을 한참동안 벌이고 있었다. 멍하니 보다가 더 큰 대대대존맛집 발견에 대한 선전 포고라도 하듯 대뜸 말해버렸다.

"나는 요즘 약 먹어. 그래서 어쩌면 이번 모임에 못 나갈 것 같아."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다시 맛집 이야기로 와글거렸다. 그 집 존맛탱. 허, 무슨 소리, 그 집보단 여기가 진까리('진짜'라는 경상도 사투리)지. 그러다 슬쩍 내게 무슨 약인지 물었다. 아무렇지 않게 공황장애 이야기를 했고, 아무렇지 않게 나도 그랬다는 대답을 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다시 맛집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또 아무렇지 않게 서서히 괜찮아질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너무 애를 써서 그렇다고 하더니, 다시 존맛탱 이야기로 넘어갔다. 약 먹을 땐 존맛탱을 많이 먹어야 한다며 나는 별 관심도 없는 맛집들을 마구마구 풀어내더니 오늘 저녁엔 뭘 먹을까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치킨은 역시 호식이 두 마리지, 였던가. 이재모 피자의 웨이팅에 관한 이야기였던가. 내가 뭘 보던 중에 조금 울먹였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그 대화의 흐름들이 너무도 자연스러웠으며 그 자연스러움을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계산된 조심스러움과 배려가 있었는지...... 이제는 그 마음들을 곡해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털어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일어나는 일.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도 있으니 받아들이자는 말도 이 친구들에게서 들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고 비슷한 경험들을 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할 순 없지만 딱히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내가 엄살을 부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고, 공황장애라 하여 나를 유별난 사람 대하듯 하지도 않았다. 내 주변은 모든 것이 여전했다. 그 여전함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조금씩 변해갈 뿐이었다.


얼마 전. 아들이 감기라 이비인후과를 갔다가 내가 다니는 병원에도 들렀다. 잠시 들러 약만 받으면 되는 거라 1층 입구에서 아들에게 물어봤다.

"너 여기에 있을래? 엄마가 금방 올라갔다 올게."

아들이 조금 머뭇거리더니 나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다.

"엄마, 사실 좀 굴욕적이지 않아?"

"솔직히 처음엔 그랬거든? 근데, 지금은 괜찮아. 너는 그때 좀 굴욕적이었어?"

"음... 아니? 나도 그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아."

"맞아, 그냥 그거야. 살짝 아픈 거야. 너 방금 이비인후과에 갔다 온 거랑 똑같은 거야. 약 먹고 나으면 되지. 너도 그때 그거 굴욕적인 일 아니었고, 엄마도 지금 이거 굴욕적인 일 아니야."

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을 받은 후 다시 1층으로 갔을 때 "베스킨라빈스에 갈까?" 물었더니 괜찮다고 했다. 엄마, 이제 집에 가자,라고 하기에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집으로 걸어갔다. 나머지 손에 들린 아들과 나의 약봉지가 우리의 걸음걸음마다 달랑달랑 흔들렸다.


이제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 조금 느긋하게 움직인다. 4층 버튼을 누른 후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어깨를 웅크리지도 않는다. 4층에서의 오픈런 또한 멈춘 지 꽤 되었다. 어차피 안에 들어가서 다시 기다려야 하는 걸 알기에 그냥 천천히 걷는다.

왜요, 제가 공황장애로 보이나요? 뭐, 괜춘. 남한테 피해 주는 것도 없고, 내돈내산잉께,라고 말하듯 가끔씩 어깨만 으쓱인다.


특별한 일이 아니다. 가벼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 하여 무거운 일도 아니다. 잠시 일어난 어떤 일. 인생의 어느 계절에 나를 스치고 있는 작고 변덕스러운 바람일 뿐이다. 갑작바람으로 시작되어 때로는 건들바람 같다가 서릿바람일 때도 있고 남실바람이 불 때도 있지만 그저 바람이다. 이제는 정말로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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