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장범준 노래 '그녀가 곁에 없다면'을 듣다가 불현듯 지난봄의 일이 생각났다.
지난봄. 남편이 특별근무에 차출되어 주말 새벽에 출근해야 했다. 주말이라 아들과 나는 자고 있었는데 남편은 평상시보다 일찍 출근해야 해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샤워하는 물소리, 옷 챙겨 입느라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살짝 잠이 깨었다. 남편 배웅을 위해 일어날까, 말까를 고민하던 중에 다시 설핏 잠이 들었는데 이마에 와닿는 차가운 기운에 잠이 깼다.
출근 준비를 마친 남편이 나가기 전 아들이 발로 차 버린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 순간 남편이 "잘 자"라고 했는지, "간다"라고 했는지는 잠결이라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데, 차갑던 손에 담겨 있던 따뜻한 온기는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일어나서 "어, 조심히 다녀와."라고 인사할까 하다가 그냥 눈을 꼭 감고 자는 척하고 있었다.
평소 남편보다 내가 먼저 출근하는 편이라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남편의 발을 발견하곤 다시 이불을 덮어주거나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건 아침마다 내가 하는 일이었는데, 그날 내가 잠든 사이 내 이마를 쓸어주는 손길이 너무 편안하고 설레었던 것이다. 남편이 나가는 문소리가 들린 후에도 한참이나 눈을 꼭 감고 잠든 척하고 있었다. 이마에 닿았던 손길이 오랫동안 여운을 남겼던 아침이었다.
그리곤 그대로 잊고 있었는데(그걸 잊다니 ㅠㅠ) 얼마 전 장범준 노래를 듣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다.
사랑이란 게 원래 시간이 지날수록
설레임보다는 편안함이 자릴 잡나요
설레임이 없는 사랑 편안함만 남은 사랑
도대체 뭐냐고 물어보면
그대여 오늘 내가 말해줄게
한번밖에 없는 사랑 영원함만 남은 사랑
그대가 뭐냐고 물어보면 그대여 오늘 내가 말해줄게
장범준 - 그녀가 곁에 없다면-
남편과 결혼한 지 이제 10년이 다 되어간다. 얼마 전엔 결혼기념일이었는데 둘 다 바빠서 잊어버렸다. 남편은 나보다도 한참이나 늦게 알았다. 예전 같았으면 화가 났을 텐데 어차피 나도 잊었고 그날 누군가가 가까스로 기억을 했다 해도 특별히 뭔가를 하진 않았을 테니 남편이 잊었다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제는 그 사랑의 형태가 조금 바뀌어서 그런가, 생각해 본다.
저 노래 가사처럼 설렘이 없는 사랑, 편안함만 남은 사랑이라기보단, 남편과 내가 가진 사랑 속에 너무 다양한 감정이 녹아 있어 사랑에 대해 말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서로의 젊은 날 속에서 같이 설레었던 시간에 대한 확신이 있고, 내가 꼭 너를 행복하게 해 줘야지 하던 어느 날의 다짐이 녹아 있고,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미안함이 함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대한 고마움도 있고, 앞으로의 날들에 대한 위로와 격려가 있다. 이런 사랑은 남편을 처음 사랑했을 때엔 알지 못했던 감정이다.
거울을 보다 문득 내 이마의 주름이 너무 많이 생겼다는 걸 깨닫고 모 연예인이 광고하는 탄력 기기를 살까, 병원에 가서 보톡스를 맞을까, 그나저나 나 이제 진짜 늙었나 보다, 사람이 이렇게 늙어가는 거구나,라고 남편한테 하소연할 수 있어서 편안하다. 이런 나지만 여전히 잠든 내 이마에 입을 맞춰주는 사람이 옆에 있어줘서, 아직 그런 온기 속에서 여자일 수 있어서 많이 설렌다.
어느 날의 아침. 또 지난 봄날과 같은 아침이 찾아온다면, "나 안 자고 있었지롱~" 하며 눈을 번쩍 뜨고 남편을 놀려줄까 싶다가도 아마도 나는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잠든 척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쁘게 달달하게 곤하게 새근새근. 뭐, 사실 예쁘진 않겠지만 아무렴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