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 후에 나를 데리러 와줘
도를 아십니까, 라고 시작하며 이어지는 조상이나 제사 같은 이야기엔 관심없지만 전생에 대해선 궁금해하곤 했다. 우주적인 거대한 기운이라든지, 시공간을 초월하는 또 다른 세계관같이 뭔가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남편과는 어떤 인연으로 부부가 되었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가끔씩 나의 하루가 꽤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늘 그렇듯 대체로 시시한 일들이 뱅글뱅글 이어지고 있고 들쑥날쑥 거리는 감정 속에서 바쁘게 헤매는 것이 전부지만 꼬박꼬박 생각나는 누군가가 마치 자전축처럼 하루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 날은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해안가에 불쑥 나타난 고래를 마주하듯 벅찬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그리곤 고래가 다시 바다로 돌아간 다음 날의 태양을 바라보듯 내일을 맞이하곤 한다. 유난히 파란 물결로 일렁이는 하루의 중심엔 늘 남편이 있었다. 그래서 때때로 많이 궁금했다.
우리는 어떻게 시작된 걸까. 나처럼 변덕스러운 애가 어쩌다가 남편의 미소 하나면 충분해진 걸까.
남편과 같은 건물에서 일한 지도 벌써 4년째다. 몇 년 전만 해도 부부가 같은 근무지에서 일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했다.
“부부라고? 한 건물에서 일한다고?” 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 한동안은 복도에서 마주쳐도 모른 척하거나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 다른 길로 돌아가곤 했다. 그러다 주변에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거 같고, ‘부부라고?’ 하는 놀람에도 익숙해질 때쯤 네, 그래요, 부부예요, 얘기했다.
창가의 햇살이 깊어지던 어느 오후. 복도 맞은편에서 남편이 걸어오고 있었다. 남편의 걸음엔 특유의 리듬이 있다. 햇살에 파묻혀 실루엣만 보였지만 내가 아는 익숙한 리듬이라 웃음이 지어졌다. 엄지와 검지를 교차하여 작은 하트를 장전했다. 남편이 나를 스치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신중하게 발사!!
남편은 못 볼 것을 봤다는 표정으로 '헉!’하고 놀라며 재빨리 몸을 돌려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지만 돌아서던 순간 입가에 살며시 걸렸던 미소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날 하루 그렇게나 기분이 좋았더랬다.
못 볼 것을 봤다는 표정부터 입가에 살짝 걸리던 미소까지. 남편은 나랑 호흡이 잘 맞다.(... 고 나는, 생각한다) 그저 웃기만 했다면 재미가 없었을 테고, 못 볼 것을 봤다는 표정에서 끝이 났다면 싸우자는 도전이었을 텐데, 그 두 가지가 절묘한 타이밍으로 이어져 있어 유쾌하게 설렜다. 복도에 고여있던 햇살이 내게로 뿜어지며 와글와글 거리는 거 같았다.
인사이동으로 언젠가는 근무지를 옮기게 될 테고 어쩌면 이렇게 한 건물에서 근무할 기회가 다신 오진 않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런 걸까. 그 순간 나를 스쳤던 설렘이 소중하게 여겨졌다. 며칠 동안 그 장면이 머릿속을 맴돌며 저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처럼 푸르게 울려대었다.
그러다,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서 전생 체험에 관한 글을 봤는데 그 후로는 아예 그 순간을 되새길 때마다 어쩌면 이번 생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틀림없이 언젠가의 생에서 겪었던 일이었을 거야'
'우리는 지난 생에서 인연이 있었던 거야. 천년의 사랑인 거지.'
혼자 진부한 신비함과 아련함까지 덧붙여가며 두근대었다. 다음 생을 다짐한 적은 많아도 전생까진 미처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
토요일 밤에 혹시나 하며 유튜브에서 전생 체험 영상을 찾아봤더니? 있었다!
"우와" 감탄하며 전생 체험을 한 사람들의 댓글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폈다. 꿀잠 잤다는 글이 대부분이었지만 간간이 전생 체험에 성공한 사람들의 글도 있었다. 전생에 조선시대 사람이었다, 들판에서 늑대한테 물려 죽었다, 전생에 누에였는데 같은 누에를 유충 때부터 좋아하다가 누에고치가 될 때쯤 당분간 서로 못 보는 거냐고 펑펑 울었는데 상대만 나방이 되고 나는 고치 안에서 죽었다, 등등.
전생에 누에고치였던 사람의 얘기가 너무 진지하게 슬프고 또 조금 웃겨서 체험 영상으로 골랐다. 전생 체험을 할 때 혼자 있으면 깨어나지 못한다는 댓글이 무서워서 거실에 있는 남편한테 일러두었다.
“30분 후에 나를 데리러 와. 내가 멀리 안 가고 잘 있는지 보러 와야 해.”
또 무슨 소리냐는 남편을 향해 그저 애틋한 눈빛으로 안녕, 하곤 안방으로 들어와 누웠다.
영상 소리를 적당하게 조절한 후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했다. 종소리가 징~할 때마다 ‘이제 전생이야? 나 지금 전생에 왔나?’ 싶어 두근거렸지만 여전히 안방 침대였다.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보자고 해서 굉장히 오랜만에 남편과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마코토가 된 듯 시간 속을 달렸더니 저 멀리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편이 보였다. 면접 스터디로 처음 만났던 학원인지, 스터디 카페인지 그것까진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문을 열며 웃는 얼굴은 확실하게 보였다. 빨간색 체크 셔츠에 까만색 가방을 메고 웃으며 들어오는 남편을 보니 이상하게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금보다 앳된 모습이라 조금 낯설었지만 너무 반갑고 귀여워서 "자기야, 나야, 나! 우리 결혼해서 애도 있다? 너랑 똑같이 생겼어." 하며 머리카락을 만져주고 싶었다.
그날의 내가 어떤 기분이었더라?
뭘 하고 있다가 남편을 봤던 걸까?
자세히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나는 여전히 안방 침대인가 본데 왜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지?
그런 생각들을 하며 영상의 소리에 집중했다.
그러다 종소리가 몇 번 더 들렸고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든 것도 같았는데, '안돼! 나 전생으로 가야 해!!' 하는 의지가 강하긴 강했는지 번쩍 잠에서 깨었다. 영상에선 당신은 몇 살입니까, 여자입니까, 남자입니까, 그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묻는 중이었다. 지금쯤 전생이어야 했는데 나는 그냥 안방 침대 위에서 자다가 깨버린 거였다.
‘젠장! 조금 전의 생은 망했다.’ 하며 다른 동영상으로 다시 시도하려고 검색을 하고 있는데 남편이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아까 자고 있더니."
"전생으로 가던 중이었는데 자버렸어."
내가 누굴 만나려던 중이었는지 알 길이 없는 남편은 나의 크나큰 실망과 좌절 앞에서 그저 무심하고 무관한 얼굴로 잘 거면 애 재우면서 같이 자라는 말을 툭, 던지곤 문을 닫았다.
“쳇, 아무것도 모르면서.”
벌러덩 누워 아까 만났던 그날의 남편을 떠올렸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던 다정하고 말캉한 그 공기가 뭐였는지 계속 생각했다. 분명히 나의 기억인데도 생경한 꿈을 꾸는 듯 조금은 낯설었지만 그 속에서 정체 모를 안도감을 함께 느꼈다. 그때부터 그 미소 하나면 충분하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생이라는 것이 정말로 반복되는 것이라면 전생에 우리가 무엇이었든, 다음 생에도, 또 그다음 생에도, 그렇게 미소 짓는 남편을 다시 만나야겠다고, 조금은 아득하고 먼 결심을 했다.
내가 어디에 있든 30분 후에 나를 데리러 와 달라고 졸라야지. 멍하니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며 꿈을 꾸듯 다짐했다. 여전한 그 얼굴로 나를 향해 웃어준다면 나는 또 그 미소에 내 인생을 걸 수 있을 테지.
한참 동안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정말로 그런 순간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함께한 시간 속에 꾹꾹 눌러 담은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언젠가의 생에선 서로를 향한 울림과 끌림이 될 수 있을까.
전생 체험은 실패였다. 그 다음번에도 시도해 봤지만 계속 잠만 잘 잤다.
여전히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고 있고 시시한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지만 남편과 함께라서 내일의 지구도 오늘처럼 자전축을 벗어나지 않은 채 무사히 뱅글뱅글 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들고 있다.
나중에... 앞으로의 다른 생에서 내가 남편을 기억하게 된다면 얼마 전 복도에서 만났던 그 장면이면 좋겠다. 그 특유의 리듬으로 나를 향해 걸어와 묵직하게 들려오던 먼 종소리처럼 "안녕”이라고 한다면, 나는 정말로, 단박에, 기어이, 남편을 알아볼 수 있을 거다.
오늘은 날이 맑고 바람이 따뜻했다. 내일 해안가엔 커다란 고래가 찾아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전생체험하기에 딱 좋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