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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Feb 14. 2023

철들지 말자던 다짐

나의 밸런타인

돌이켜 생각해 보니 2014년도에 아이를 낳고 우울증이 살짝 왔었던 거 같다. 언젠가, 그때 썼던 일기장을 펼쳐봤는데 우울한 내용뿐이라 너무 놀랐다. 분노와 슬픔을 조절하지 못하고 있던 스스로의 모습이 낯설어 일기장을 버렸는데 딱 한 편의 일기는 한글 파일에 옮겨놓고 보관하고 있어 가끔씩 이렇게 꺼내본다.     


어느 아침에 남편과 함께 철들지 말자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요즘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남편을 괴롭히고 있었다.

'너를 괴롭히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지금 내가 많이 힘드니깐...' 하는 마음이었지만 속으론 ‘너랑 한 결혼으로 내가 지금 좀 괴로워.'라는 원망이 없진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너를 몹시 사랑하지만 내가 조금만 더 어렸다면 결혼까진 하지 않았을 거라고 내내 생각했다.

잠든 남편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너랑은 굉장히 아픈 이별을 하고 아주 오랫동안 힘들어했겠지만, 결혼까진 하지 않았을 거야.'라는 생각을 하던 밤이 많았다. 남편의 턱은 남자치곤 가는 편이라 자는 모습이 유난히 어린애 같고 가끔은 안쓰러워 보이기도 하는데 그런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어쩌면 나는 너랑 헤어졌을 거야.'라는 생각을 하다 보면 내가 많이 변덕스럽고 이기적인 사람 같았다.


나는 애당초 결혼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어서 우리는 결국 불행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구체화되고 명확해지던 중이었다. 결혼을 해도 나는 여전히 '나'인데 결혼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내게 주어졌던 역할들이 부당하게 느껴졌다.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없게 하는 것들이었다.


서서히 불행해지겠지.

이렇게나 좋아하는 사람 옆에서 나는 점점 웃을 일이 없어지겠지.

나 때문에 너도 행복하진 못할 테고, 나는 그 미안함까지 끌어안고 더 힘들어지겠지.

이런 생각들은 내 의도와는 관계없이 어떤 형태로든 밖으로 표출되고 만다. 그리하여 나는 요즘 꽤나 치졸한 방법으로 남편을 괴롭히고 있었다.


퇴근 후 저녁.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졸리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해서 감기는 눈을 깜빡이고 있으려니 남편이 음악을 틀었다. 요즘 자주 듣는 음악이 있다며 나한테 들려주고 싶다기에 대체 뭔가 싶어 가만히 들었다. 남편이 좋아하는 MC스나이퍼의 노래였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이다. 연애할 땐 늘 같이 MC스나이퍼의 노래를 들었다. 듣고 있던 가사에 취한 남편이 랩 한 소절을 따라 부르면 그 목소리와 숨결이 멋있어서 '이 멋진 순간이 또 이렇게 흘러가버리구나. 이런 찰나는 내가 어떤 형태로든 붙잡아두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뭔가가 조금은 원망스럽고 조바심이 느껴질 정도로, 그때의 나는 그렇게나 설레었다.


그 시간들이 불과 1~2년 만에 잊혀져 가고 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생각하느라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얼핏 '도난당한 낭만'이라는 낮은 읊조림이 스쳐 지나갔다. 괜히 심장이 빨리 뛰었다.

"무슨 노래야? 가사가 너무 빨라."

나의 말에 남편은 또 가사를 못 알아듣냐 핀잔을 주더니 핸드폰을 만지작거려 가사를 찾아주며 다시 들어보라 했다.


여자라면 그 누구나 꽃잎처럼 자라 억센 아줌마란 꼬리표를 달고 현실을 살아가

어머니의 낭만이란 마치 커다란 사치인양 변덕 심한 어린아이 달래듯 그냥 넘어가


빠른 랩 가사를 눈으로 따라가며 듣느라 이번에도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남편이 왜 이 노래를 나한테 들려주고 싶어 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네가 요즘 뭘 고민하는지 알아. 여자는 나이 들어도 여자지. 나도 너를 그렇게 늙어가게 하고 싶지 않아."

후렴구를 따라 부르던 남편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무심하게 툭 던지며 말했다.

그러곤 다시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딱거리며 붙잡고 있던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알아듣기 힘든 랩 가사 때문에 미간을 찌푸리며 노래에 집중했지만 어쩐지 조금 울고 싶어졌다.

'나도 너를 그렇게 늙어가게 하고 싶지 않아.'

귓가에 그 말만 빠르게 맴돌았다.

너는 이런 나를 이해하는구나. 그런 네가 있어 나는 여전히 나구나.

나는 그렇게 여전히 나라서, 여전히 여자라서, 참으로 단순하고 간단하게 그 도로 위에서 다시 꽃잎처럼 피어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이상한 순간이었다.


다음날 먼저 잠에서 깨어나 남편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이전엔 느껴보지 못한 짠함이 밀려들었다.

너는 분명히 애였는데. 나보다 훨씬 더 철이 없다 싶은 어린애였는데.

너는 나 같은 고민을 할 틈도 없이 무거운 어깨를 지닌 채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버렸구나.

어느새 나를 달래고 있네. 나 또한 너한텐 전보다 더 많이 참아내야 할 존재가 되어버렸네.


'철들지 말자, 자기야'

출근 후 업무를 시작하기 전 메신저로 아침인사를 건네며 남편한테 얘기했다.

'넌 계속 유치하게 랩이나 지껄이고 예전처럼 자동차나 가지고 놀고 철없는 어린애처럼 굴어. 내가 애 안 먹일 테니 철들지 마'라고 했다.

이미 어깨가 무거워진 내 남편은 온 감각을 내게 열어놓고 있어 나의 말에 찰떡같이 대답한다.

'그래, 우리 철들지 말자.'

깜박이는 커서 뒤로 다음 말을 찾지 못한 채 키보드 위의 손가락이 머뭇거리는 사이 괜스레 눈물이 맺히는 아침이었다.



기억이란 것이 조각조각 편집되고 한없이 미화된다는 건 이런 건가 보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내 기억 속엔 어느 아침의 그 다짐만 남아 있는데 남편의 기억 속은 어떨지 모르겠다.

일기를 꺼내보니 울컥 감정이 튀어 오른다.

밸런타인데이니 퇴근길에 초콜릿 하나 사들고 가서 '오다 주웠다' 하며 무심한 척 툭 던져주고 싶은데 감추지 못한 설렘이 허락도 없이 튀어나올까 싶어 망설여진다. 아무래도 이건 조금 더 신중히 생각해 볼 문제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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