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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Jan 21. 2023

내가 모르는 내 얼굴

'나'라는 사람의 범위

최근 휴대폰을 바꿔야 했다. 아들이 밖에서 놀다가 휴대폰을 박살을 내고 들어왔는데 새 휴대폰으로 바꿔줘 봤자 조만간 또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아 내가 쓰던 휴대폰을 아들한테 주고 집에 있던 공기계(아주 구버전의 아이폰)를 내가 쓰기로 한 것이다.

용량이 너무 적어서 사진을 다 정리해야 했다.


며칠 꽤나 아파서 침대에만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약기운에 까무룩 잠들기 전까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사진 정리를 했었다. 그저 찍어놓기만 하고 정리를 하지 않아 생경한 느낌의 사진들도 꽤 많았다. 보다 보니 내 얼굴이 참 낯설었다. '내가 이렇게 생겼다고?' 하며 깜짝 놀랐다.   

거울 속의 '나'는 내가 자주 들여다보는 각도와 나만의 표정이 있어서 눈의 크기나 웃을 때의 입모양, 얼굴 근육의 움직임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지는 얼굴형까지 모두 평소 내가 인지하고 있는 내 모습이라 '나'같았는데, 남들이 찍어준 사진이나 내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 찍힌 사진 속의 '나'는 평소 내가 알던 나의 얼굴과는 조금 달랐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내가 알고 있는 나와는 다른 모습의 나도 있었다.


'내가 그래도 쟤보단 예쁘지.'에서의 '쟤'를 맡고 있진 않겠지?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살고 있었는데 휴대폰 사진을 보다 보니 어쩌면 내가 그 '쟤'일 것 같아서 잠시 심각해졌다.

 

아니야, 이건 내 얼굴이 아니지.

에이, 사진 찍는 사람이 잘못했네. 이 각도에선 누구라도 당연히 찐빵처럼 나오지. (남편씨야, 이런 사진을 찍을 때는 나한테 말하고 찍었어야지. 버럭!)

헐, 나는 이렇게까지 생기진 않았는데? 내가 이런 비율이라고?


자기 부정과 남 탓을 반복하며 사진을 정리하다가(죄다 지우다가) 문득, 내가 모르는 내 얼굴까지 굳이 내 맘에 들 필요가 있나 싶었다. 어차피 나는 평생 이 각도로 내 얼굴을 인지할 테고 내가 볼 수 있는 나의 모습은 제한적이다. 다각도로 보이는 모습이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을 하는 사람도 아닌데, 딱 이 정도의 모습이라도 스스로의 맘에 들면 그뿐인 거 아닌가, 싶어 사진을 정리하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한결 가뿐해졌다.

(실은 약기운이 돌아 졸려서 그런지도 모른다)


어디까지가 나인 걸까.

잠들기 직전까지 '나의 범위'에 대한 생각을 했다.

셀카 속의 나와 내가 모르는 틈에 남편이 찍어준 사진 속의 내가 동일인이긴 하지만, 내가 인지하는 나의 범위는 셀카 속의 나뿐인 거처럼 그냥 딱 그 정도만이라도 책임지고 살아가면 되지 않나.

남들이 아는 '나'와 내가 아는 '나'가 같아야 그게 '나'일까. 비단 얼굴만이 아니다.


한동안 나는 남들이 아는 '나'와 내가 아는 '나'가 같아야 그게 나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아는 나도, 그들이 아는 나도, 저들이 아는 나도, 모두 같은 모습의 나이고 싶었기에 늘 긴장해야 했고 꽤나 고단한 미소를 유지해야 했다. 언제나 조금은 좋은 사람이고 싶었고 남들보단 열심히 하는 사람이고 싶었으며 매 순간 유쾌하고 단정하고 싶었기에, 내가 인지하고 있는 '나'보다는 더 많이 웃어야 했고 가식적이어야 했고 애를 써야 했다.

내가 그러는 동안 내가 알고 있는 나, 내가 인지하고 있는 나조차도 제대로 보듬지 못하여 거울 속의 내가 점점 아프고 외로워져 가고 있는 걸 미처 몰랐다. 아파서 침대 속에 있는 온전한 나(... 의 범위가 어디까지 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에게 잠들기 전까지 사과했다.

미안해, 미안해. 너부터 보듬지 못해서 내가 좀 많이 미안해.  


어떠한 각도에서의 나도 물론 '나'이겠지만, 지금의 나는 거울 속에서 내가 마주 보고 있는 나까지만 생각하고 싶다. 내가 인지하고 있고 내게 익숙한 모습의 '나'만으로도 가끔은 버거우니, 그저 거울 속의 나에게만이라도 충실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조금씩 내려놓는다는 것이 이런 것들인가 보다.

나조차 모든 순간의 나를 통제하긴 힘이 들고 항상 맘에 들 순 없다. '나'의 모든 모습에 책임질 수 있으면 좋겠지만 흘려보내야 할 것들은 그저 흘려보내야 하지 않을까.


달리기를 하다 보니 매 순간을 모두 밀도 높고 단단한 들숨과 날숨으로 채울 순 없었다. 때때로 조금은 성글게 드문드문 이어지는 가느다란 숨이 있어야 계속 달릴 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아주 사소한 순간만이라도 진심을 다하자. 그러다 보면 알지 못하는 순간들 속의 나도 조금은 진심에 가까워져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진짜 나'를 마주하게 되겠지.


지금, 거울 속에서 웃고 있는 나를 마주 본다. 미소도 눈빛도 근육의 움직임도 마음에 든다.

적어도 이 모습만큼은 오늘의 내가 진심을 다해 책임져야 할 '나'다.

아들이 그린 그림 속의 나. 가장 맘에 드는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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