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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Jan 31. 2023

기록에 대한 취향과 끈기

 어쩌면 절실함의 문제인가

작년 가을부터 기웃거리며 살펴보는 블로거가 몇 있다. 요가수련, 런데이, 필사, 비건식단, 플라스틱 미사용 챌린지, 제로웨이스트 등에 대한 기록을 굉장히 집요하게 하는 분들이다. 보다 보니 그 깊이와 끈질김이 꽤나 감동적이라 점점 고무되기 시작했다. '어랏! 나도 뭔가 하고 싶은데?'라는 생각이 점점 고조되고 있던 날들이었다. 그러다 어느 기록광의 다이어리 소개글을 보게 된 것이다.

그 블로거는 매일 쓰고 자주 쓰고 여러 권(10권이 넘었던 거 같다)을 한꺼번에 쓰면서 온갖 기록을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아침과 저녁 다이어리가 따로 있음은 물론이고 머물고 있는 장소마다 별도의 다이어리가 있어 시간의 흐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생각도 적고 영어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필사도 하고 신문 스크랩도 하고 아무튼, 엄청나게 기록하고 있었다. 이 단단한 문장력은 많이 쓰는 것에서 비롯된 걸까. 그 글을 보다가 '아! 이거다.' 했던 것이다. 기록을 이어가는 모습과 기록에 대한 생각들이 정말이지 너무 멋져서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 한껏 고무되고 만 것이다.


사다 놓기만 했던 노트와 다이어리를 끄집어내었다.

우선 내가 계획했던 기록은 이렇다.


1. 모닝페이지

: 좀 있어 보이고 싶어 이렇게 이름 붙였지만 사실 아침에 쓰는 일기다. 기상 시간을 쓴 후 5분 동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모조리 기록한다.


2. 운동일지

: 요가수련과 런데이에 대한 기록들. 오늘은 콰트 '은아의 지친 몸과 마음 치유' 빈야사 중급 2를 했는데 지난번만큼의 멘붕을 겪진 않았다. 대체로 침착한 호흡을 유지하며 팔다리도 나름의 의지를 가지고 움직였다. 물론 누가 봤다면 굉장히 기묘한 몸부림으로 보였을 테지만 이번엔 확실히 의식을 가지고 했다. 어쨌든 스탠딩스플릿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런데이 앱의 트레이너한테선 여전히 맑은 광기가 느껴진다. "자, 피부에 와닿는 바람을 느끼며 달려보세요." 이러고 있다. 오늘 영하 7도였는데? 뭐 이런 기록들


3. 아무거나 노트

: 남편이 남해 독일마을에서 판다는 맥주를 얻어왔다. 엄청 이쁘게 생긴 패키지였는데 맛은 그냥 그랬다. 그나저나, 폴바셋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근데 꼭 폴바셋이 아니라도 괜찮다. 나뚜르도 좋다. 뭐 이런 기록들. 말 그대로 아무거나 쓴다. 일시적이고 휘발성이 강한 기록들로 뇌로 치자면 해마에 잠시 저장될 정보들?!    


4. 일기장

: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바로 그 일기장. 아무거나 노트에 한 줄 정도 적혀 있던 것들 중에 좀 더 구체적으로 몇 줄 더 보태어 쓰고 싶은 일들을 기록한다. 몇 월 며칠 날씨 맑음. 오늘은 철수랑 싸웠다. 철수 이 나쁜 새끼. 뭐 이런 기록들


5. 육아일기

 : 이건 가장 최근 브런치에서 다짐했던 기록


6. 소비일지

: 1년간 옷 사지 않기, 육류소비 지양, 주 3회 무지출데이 등을 결심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록들


7. 스케쥴러

: 월간 다이어리로 가족들의 생일이나 병원 진료와 미용실 예약, 연가 사용 등을 기록


8. 주간일기

: 블로그 주간일기를 위한 기록. (25일) 4일 전에 심은 튤립 구근에서 싹이 올라왔다. 왜 벌써 나오지? 4~6주 후에 싹을 볼 수 있다고 적혀 있던데?! (28일) 남편이 뉴진스라는 가수 노래를 들려줬다. 엄청 몽글거리는 느낌이라 맘에 든다. "이건 꼭 4월 이야기를 보던 시절의 감성인데?" 했더니 남편도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정말 다른데 간혹 엄청 같다. 남편이 이 노래를 알려줘서 기부니가 참 좋다. (29일) 튤립의 화분을 바꿨다. 싹이 나왔다기 보단 화분이 너무 작아서 흙과 함께 구근이 솟아 오른 거 같다. 구근 발사 ㅠㅠ 잘 모르겠지만 일단 구근이 흙 밖으로 하얗게 보이고 있어 이건 좀 아닌 거 같아 일단 바꿨다. 봄에 튤립을... 볼 수 있을까? 봄부터 울던 소쩍새의 마음으로 나도 열심히 울어야겠다. 소쩍쿵소쩍쿵. 대충 이런 기록들


그러나, 딱 일주일정도 해 보곤 몇 가지는 접었다.

모닝페이지, 운동일지, 소비일지, 주간일기. 모두 그만뒀다. 나한텐 그러한 성실함과 끈기가 없었던 것이다.

일단 아침엔 바쁘고 멍 때리느라 모닝페이지는 딱 두 번 '졸린다. 커피를 마시고 요가를 할까'라고 쓴 것이 전부였고, 운동을 하고 나면 힘들어서 운동일지를 따로 쓸 수 없었다. 게다가 어플에 운동기록이 다 남기 때문에 굳이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 노트에 쓰다 보니 이미 거기서 지쳐버려 간신히 이어가고 있던 블로그 주간일기도 놓치고 말았다.

스케쥴러, 아무거나 노트, 일기장, 주간일기. 이 네 가지는 쓰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일주일 동안 '아무거나 노트'에만 이것저것 잔뜩 끄적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기록 속에 내가 갇히는 느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하다 보니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어 그걸 세밀하게 기록하고 싶었던 건데, 기록을 하기 위해 아침에 일어났고 달렸으며 요가를 했었다. 쓰고 싶은 것이 떠오르지 않는데도 괜히 무언가를 쓰려고 하니 단 한 줄도 쓸 것이 없었다.

쓰고 싶은데 쓰고 싶지 않다. 이런 거나 쓰고 있었다.


브런치를 처음 시작했을 때에도 어느 블로거의 브런치 합격수기(?)를 보고 '우와, 멋지다. 출판까지?!' 하고 감동을 받아 시작했었다. 자주 감동받고 아주 쉽게 고무되는 나는, 내가 브런치를 시작하게 되면 그 블로거처럼 출판 작가가 될 거라 생각했다. 이건 마치 내가 유튜브를 시작하기만 하면 백만 유투버가 되고 말걸?! 하는 식의 약간은 초딩스러운 호기랄까. 꿈을 꾸려면 대통령이나 미스코리아 정도는 꿔야 하는 거 아니야? 아, 뭐 그러다가 아님 말고! 이런 종류의 어설픈 패기랄까.  

그러나, 브런치를 시작한 지 2달이 지나가도 구독자 수는 간신히 10명 남짓이라 시작할 때 지녔던 꿈은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구나, 깨닫고 있다. 내가 유튜브를 한다 해도 어쩌면 백만 유투버는 안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까지 더해져 좀 실망 중이다.


다만, 시작할 때의 패기가 남다른 만큼 잘 안 된다 싶을 때의 태세전환 역시 남다른 구석이 있어 기록에 대한 생각을 재빠르게 정리하고 있다.

연초 결심 중에 브런치북 발행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오히려 브런치를 통한 기록들이 내 취향에서 멀어진 것도 있었다. 사실 '아무거나 노트'에 쓰는 글들이 내 취향에 가장 가까운 기록들이지만 그런 글로는 브런치북 발행이 좀 곤란하지 않을까, 잠시 생각했던 것이다.


여전히 뭔가를 쓰는 일은 내가 가장 재미있게   있는 일이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자칫 잊혀질지도 모르는 어떤 찰나의 먼지를 털어내고 의미를 덧붙여  순간의 빛과 어둠을 온전히 기억하는 것은 내가   있는 가장 행복한   하나이다. 브런치북을 위해 뭔가를 기록하기보단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내게 알맞도록 내가 즐거운 방식으로 기록해야겠다. 브런치북을 발행하지 못하면  어때,라고 생각해 본다. (~ 본다, 이런 식의 말하기도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라는  글을 쓰면서 알았다.  취향을 알아간다는   많이 행복한 일이다.)


아무거나 노트와 일기장, 육아일기. 이 세 가지만 열심히 써도 충분할 것 같은데 과연 끝까지 할 수 있을까.

아! 그러니까, 결국 이건 절실함의 문제인가 싶기도 하지만, 나의 시간과 나의 기억에 대한 기록이니 나의 취향에 꼭 맞는 것이 최고인 것 같다. 깊이를 가진 멋진 글과 그 글에 걸맞은 단단한 사람들을 보며 '우와~' 하는 감탄사를 쏟아내는 것 역시 내 취향에 꼭 맞는 일이라, 오늘 아침 흉내내기를 그만두며 저 노트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뿐하고 상쾌해졌다.


나는 그냥  취향대로 기록하련다.

일주일 천하 기록노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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