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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Mar 12. 2023

자기만의 방

'I'가 에너지를 얻는 방법  

내 방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있었지만 최근 들어 꽤나 스트레스가 될 정도로 내 공간이 필요해지고 있다.

MBTI는 잘 모르지만 유재석의 놀면 뭐 하니에서 'I'형과 'E'형에 대한 주제를 다룬 후로 그 둘은 확실하게 구별하는데, 나는 '파워 I', '확신의 I'이다.

성격이 내성적이진 않다. 잘 웃고 주변사람들과 농담도 잘하는 편이며 서로 말이 없이 어색하게 앞만 보고 있는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어하여 뭐든 먼저 떠들어대기도 한다. 할 말을 속으로만 담아두고 끙끙대는 사람도 아니라서(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말이라거나 하극상만 아니라면 끙끙 앓느니 할 말은 하는 편이다.) MBTI 검사를 하기도 전부터 주변에선 내가 당연히 'E'일 거라 예상하던데, 나는 'E'와 'I'가 반복해서 나오던 시기를 몇 차례 거친 후 최근 들어선 확실하게 'I'가 나오고 있다.


표면적인 내 모습은 나름 사회화(자본주의화)가 잘 되어 있어 일정 시간 동안은 'E'인 척할 수 있을 뿐이며, 'E'성향에 대한 필요성과 나의 의지에 따라 그 정도의 조절이 가능할 뿐, 본질적으로 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시간보단 혼자 있는 시간을 훨씬 더 좋아하는 파워 'I'이다. 혼자서 글을 읽거나 쓰고 요가를 하거나 그저 멍하니 있을 때가 가장 평화롭고 즐겁다. 정물화 속에 존재하듯 그저 고요하게 잠겨 있을 때가 좋다. 그러한 순간이 신나고 재밌다.


혼자 있는 시간이 확보되지 못하면 누군가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에너지 자체가 없어 웃음과 평정을 유지하는 일이 꽤나 고단하며 가끔은 고통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질서를 지키는 일에 진지하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어째서 혼자 있을 수가 없지?라는 억울함이 들 정도로 그저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 그 자체가 힘이 들 때가 종종 있다.  


꽤나 극단적으로 힘든 순간들도 가끔 있어서 이런 성향 자체가 일종의 우울증인가 싶을 때도 있고 어쩌면 대인기피증의 일종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일상에서 딱히 큰 문제를 겪고 있진 않아서 성격테스트 따위를 할 때만 드문드문 생각하는 주제였다. 어쨌든 내게 있어 남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견뎌야 하는 시간의 한 종류이며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과정은 '극복'이다. 그 사실이 겉으로 드러나고 있느냐, 잘 감춰지고 있느냐의 문제였다, 그동안은.


최근 들어 나의 이런 성향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가족과의 관계 때문이다.

아들이 자라면서 자신의 의사가 분명해지고 스스로의 생각이라는 것이 생기면서 점점 내게서 분리되기 시작하자 나에겐 극복의 대상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이다. 아들이 내는 소음이 타인의 소음으로 인식되어 방해가 되고 있고, 주말에 예고 없이 들이닥친 아들의 친구들이 내 공간을 어지럽히며 휩쓰는 것이 점점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근무지가 바뀌면서 집에 일찍 오고 있어도 엄마가 도와주던 집안 일과 아이 양육을 스스로 하다 보니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오히려 줄어든 탓도 큰 것 같다.


잠시동안은 'E'형인척 할 수 있지만 그 시간이 오래 지속된다거나 갑작스레 닥치면 과부하가 온다. 부등호의 방향이 급격하게 반대편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남편은 이런 내 성향이 이기적이라서 그렇다고 하는데, 나는 이것이 이타적이냐 이기적이냐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편이야 말로 나를 사랑한다면 이런 성향을 좀 이해해 주면 안 되나? 하는 서운함이 든다. 다른 것을 욕심내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일정 시간 혼자 있고 싶고 휴일의 쉼과 내 공간의 무탈함을 지키고 싶다는 건데 왜 이게 모성애도 없고 희생이 없는 무책임한 부모의 모습으로 비치는 걸까.


집에서 요가를 하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요가를 할 때만이라도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었다. 요가 매트 위에 있는 동안은 그곳이 나의 공간이고 온전한 내 시간이었기 때문에 평온했다. 무얼 하든 요가 매트 위에서 하면 고요하고 평화로워서 거기서 독서와 메모하는 것을 즐긴다. 하기 싫어 미뤄뒀던 전화 연락도 그 위에선 척척 할 수 있다.

한창 달리기를 할 때, 달리는 동안 나의 시간과 공간이 점점 확장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달리기를 시작했던 세 번째 날 그걸 깨닫고 길 위에서 조금 울었다. 정말이지 너무 좋았는데 그걸 그렇게나 좋아하는 내 모습이 어이가 없어 맘에 들진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이런 시간과 공간을 통해 일상을 유지하고 지켜낼 힘을 얻는다. 각자 삶의 에너지를 얻는 방법이 다른 것이다. 주변 상황이 어떻든 소파에 늘어져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유튜브를 봐야지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듯 나처럼(이 꼴 저 꼴 안 보고) 잠시라도 혼자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주변에 이 꼴과 저 꼴이 많을수록 혼자 있어야만 하는 시간이 좀 길어지긴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내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사랑'에 대한 방법과 허용 범위가 남들과는 조금 다를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가족을 사랑한다. 온 힘을 다해 사랑하고 있다. 다만 나와 동일시하진 못할 뿐이며 완벽하게 타인으로 그 존재를 인지한다. 가족이 절대 '나'는 아니다. 그저 많이 사랑하니까 서로의 다름을 참아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고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아들과 남편을 잘 극복하고 싶다. 나랑은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내게는 결국 자극이며 극복의 대상이다.

밖에서 'E'인척 하며 수많은 타인을 극복해내고 있다. 거기까진 눈치채지 못 한 척, 덜 예민한 척하려 한다.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무탈하게, 가능하면 유쾌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집에서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안간힘의 정도는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방법은 같다. 그러기 위해선 집에서도 나의 공간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부쩍 많이 드는 요즘이다.


요가매트만큼으로는 점점 부족해지고 있음이 느껴진다. 내 공간이 필요하다. 온전한 나를 풀어놓고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야 진심을 다해 삶과 주변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길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에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잔뜩 비틀어지고 부서져 군데군데 모가 나선 옹졸함을 드러낸 채 돌아와 다시금 깎이고 정비되는 있는 과정의 나를 날 것 그대로 보이며 드러내고 싶지 않다. 나와는 너무 다른 어떤 종류의 모습까지 보며 견뎌야 하느니 가끔은 서로 적당히 외면하고 모른 척하고 싶다.

나의 본질이 바뀔 수가 없다면 그것을 조금 숨길  있는 호흡  여유와 채우고 싶지 않은 서로 간의 여백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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