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밤

by 날아라빌리

오래전부터 해가 지는 풍경이 싫었다.

땅거미가 뒤덮이며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 모양이 쓸쓸해 보여 맘에 들지 않았다. 어둑해지기 시작한 하늘이 내려앉고 어슴푸레한 보랏빛 공기의 밀도가 높아질 때면 무언가가 끝나가고 있다는 허무함과 덧없음이 서러웠다. 다가올 까만 밤의 외로움이 무서웠다.


다 끝났다는 듯 미련 없이 가라앉던 태양이지만 저 반대편에선 아침을 열며 찬연한 햇살을 뿌려대고 있을 터였다. 길게 이어지던 밤 속에 오도카니 남겨져 한낮의 햇살을 떠올리다 보면 지금은 없는 그 햇살과 그 햇살만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과 그 기억 속에 묶여버린 감각들이 온통 뒤엉켜 시커먼 어둠 속으로 빨려 들곤 했었다. 이제는 정말 끝이구나, 어둠 속에서 중얼거렸다.


낮과 밤의 경계가 허물어져 사실은 처음부터 빛은 없었고 그저 어둠뿐이었는지. 나는 점점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고 꿈과 현실의 경계마저 허물어지려 할 때쯤 전화벨이 울렸다. 아무 말 없이 전화기만 들고 있었지만 나만큼이나 긴장한 낯선 숨소리가 흘러들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 그의 숨소리가 아니다. 그가 있는 곳임은 분명했지만, 그는 아니었다. 조심스러운 리듬을 지닌 가느다란 호흡의 주인공은 그의 그녀였다.


그녀와 나는 대체 얼마 동안을 그러고 있었던 걸까. 전화 너머의 어두운 침묵 속에서 지난 시간들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와 그녀는 어떻게든 떼어내려 하고 있고, 나는 어떻게든 붙잡아두려 하고 있는 시간들.

누구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격한 감정들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숨소리만 듣고 있었는데 문득 전화기 너머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온 신경을 기울여도 들리지 않던 그 소리가 그녀의 곁에서 들려왔던 것이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아마도 그러겠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내가 직접 느끼며 가슴을 부여잡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고통이었다.

전화기를 붙잡고 있던 손바닥에 질퍽하게 땀이 배어 들었고, 마른 호흡을 삼키느라 목이 따끔거렸다. 점점 거칠어져 가던 내 숨소리와는 달리 조금씩 잦아들며 편안해지던 그녀의 숨소리에 결국 억눌렸던 울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내 울음소리에 놀란 그녀가 먼저 전화를 끊어버린 건지 정신을 차려보니 뚜우- 하는 무채색의 단조로움만이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도대체 왜 전화한 거야?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은 채 날카롭게 소리 질렀지만 이유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갇혀 있는 긴 밤을 확인하고 싶었을 테지. 누군가의 끝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시작이란 것. 그 또한 이 밤에 내가 감당해야만 하는 어둠이었다.

나를 감싸고 있는 시간들은 잔뜩 뒤틀려져 있어 밤은 자꾸만 길어졌고 해 뜨는 풍경은 서서히 잊혀 갔다.

"그래, 끝이야. 그래서 네게는 시작이겠지."

나의 중얼거림도 짙은 어둠 속에 흩어지며 긴 밤 속으로 녹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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