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니는 왜 사랑니인가

by 날아라빌리

맥락 없이 불쑥 예전의 일들이 떠오를 때가 있는데 요즘 들어 유난히 그렇다. 휘발성이 강한 기억들이라 이미 많이 흐려졌고 어떤 것들은 두루뭉술하게 세월 속에 녹아들어 구체적인 서사는 진작에 날아가버리고 없다. 그저 한두 가지 이미지나 단편적인 장면들로만 이어져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잠시 머릿속을 스친다. 그럼에도 간혹 그렇게 문득 떠오르는 걸 보면 지나쳐 왔던 그 시기가 내 인생에 꽤나 깊은 흔적을 남겼구나 생각한다.


기억 속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나 '사랑니'다. 새로운 여름이 찾아오면 충치를 치료하고 사랑니를 뽑곤 했었다. 아니, 사실 여름이라서 뽑았다기보단 지난해부터 준비해 왔던 일들이(가령, 어떤 시험 같은 것) 아무 소용없는 일로 결론 났던 시기가 하필 여름이었던 것이다. 여름은 잔뜩 무기력해진 채 어떤 체념을 품고서 '사랑니나 뽑아야지' 하며 남은 이를 하나씩 뽑곤 했다.


사랑니를 뽑다가 너무 아파서 이렇게나 아픈 주제에 이름은 왜 그렇게 이쁘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두 번째 사랑니를 뽑았을 때였던 거 같다.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혀서 투덜대니 의사 선생님께서 "글쎄, 그런 건 의대에서 안 배웠는데요."라고 하셨다.

의대에서 안 가르쳐 준 게 아니라 선생님이 대충 배워서 얼렁뚱땅 의사가 된 건 아니냐 했더니 지지 않겠다는 듯 엄살이 너무 심하다며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아파하는 사람은 처음이라 하셨다.

"제가 원래 좀 섬세하고 예민합니다."


이제는 그 병원의 위치도 조금 가물거리고 의사 선생님의 얼굴이나 목소리 같은 건 아예 기억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그 대화들만 뭉근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선생님은 오늘 치료가 끝났다고 말하며 진료대 위의 전등을 끄셨다. 바로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던 눈부신 빛이 사라지자 순식간에 어둑해진 사위와 그 순간 속으로 살짝 밀려들었던 현기증마저도 여전히 선명하다.

역시 난 예민하고 섬세해, 하며 다시금 혼자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렇게 사랑니를 뽑은 후 며칠이 지난 아침에 양치질을 하다가 하얀 치약 거품 사이로 붉은 피가 연하게 번지는 걸 보았다. 사랑니를 뽑았던 자리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더 이상 아무런 통증도 없었는데, 그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는 않았나 보구나 생각했다. 나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상처가 내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질적으로 느껴져 고개를 갸웃거렸다.

욕실의 거울 속엔 입가에 하얀 거품을 묻힌 채 눈동자를 불규칙적으로 깜박이는 얼굴이 있었고, 그 얼굴 위로 떠오른 것은 어떤 당황스러움이었다.

이게 내 상처란 말이야? 정말?! 이런 생각을 했던 걸까.

아무튼, 아침부터 예쁘네, 이 사람,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사랑니는 왜 이렇게나 예쁜 이름이냐는 대화를 떠올리며 하얀 치약 거품 속에 묻어 나오는 상처의 흔적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의외로 사랑니란 이름이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잘 어울리는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사랑니란 이름으로 불리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랑과 사랑니는 조금 닮은 듯했다. 그래서 이름이 사랑니인가 싶었다. 지독하게 아픈 것부터, 이제는 다 나았다고 확신했고 더 이상은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왜 이러지? 싶은 순간까지도, 모두 어렴풋이 닮아 있구나 했었다.


불쑥 떠오른 이 기억들 때문에 이제야 사랑니의 이름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성인이 될 무렵. 즉, 사랑을 시작할 무렵에 나오는 이라 해서 그리 부른다고 한다. 영어권에서는 지혜치아(wisdom tooth)라고 하며 역시나 성인이 될 무렵이란 뜻과 같은 결인 듯했다.


도대체 사랑니는 무얼 말하고 싶어서 내 안에서 솟아나고 존재했던 걸까. 이렇게 문득문득 떠오를 정도로 내게 남겼던 흔적이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사랑니는 왜 사랑니인 거죠, 했던 그날의 나를 만나 그게 왜 궁금했냐고도 물어보고 싶다.

외쳐서는 안 되는 사랑을 가슴속에만 꼭꼭 품고 살다가 벅차오르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쏟아내고 말아 구석으로 쫓겨나버린 외로운 로맨티시스트로 생각했던 걸까, 사랑니를?


글쎄요. 알 수 없다, 알 수 없어.

사랑니가 있던 자리의 텅 빈 구멍이 조금 허전할 뿐이다.


#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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