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안에서

by 날아라빌리

학창 시절을 함께 한 것은 HOT와 젝스키스라고 생각했는데 뒤돌아 다시 생각해 보니 단연코 듀스였다.

'말하자면'으로 첫방을 했던 다음날 들려왔던 소식에 김성재를 좋아했던 친구가 교실 바닥에서 뒹굴며 울었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기도 전에 그저 그 친구의 모습이 너무 슬퍼서 반아이들 모두 같이 울었다. 수업하러 들어왔던 선생님들마다 당황하여 쩔쩔매셨던 모습들이 떠오른다. 눈치도 없이 호통을 치며 교과서나 펼치라고 했던 선생님은 그 학기 내내 우리의 적이었다. 한동안 꽤 슬퍼서 노래만 들어도 (친구를 따라) 울었지만 언제나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는 듀스였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감기를 앓듯 '말하자면'을 듣던 시기가 있었다.

너의 앞에선 항상 땅을 쳐다봐

너의 뒤에선 항상 너를 쳐다봐

그 노래 가사가 전부 내 얘기 같아서 줄리엣이라도 된 듯 '오! 로미오!' 하며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또 금세 잊어버린 채 잠이 들곤 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 절기가 품고 있던 사연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 마음의 무게와 깊이로 그 노래를 듣곤 했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벚꽃이 흩날리는 소리와 낙엽이 뒹구는 소리만큼이나 아름다웠던 어느 시절의 작은 한숨이었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여고였지만 같은 재단의 남고가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나란히 있던 교문만 달랐을 뿐 그 문 하나를 지나면 학교 사이엔 경계가 없어 실제로는 남녀공학 같기도 했다. 점심시간이나 야간자율학습이 시작되기 전 친구들과 일부러 학교 안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쟤는 우리 독서실 다니는 애야, 쟤는 나랑 같은 봉고 타는 애야, 쟤 누나가 우리 학교 3학년 선배 누구야.

우리는 저마다의 '쟤'가 있었다. 우연을 가장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각자의 '쟤'를 만났을 때, 그 '쟤'의 반응에 따라 다 함께 울거나 웃으며 다음 이야기를 상상하곤 했었다. 그럴 때 비지엠은 당연히 '말하자면'이었다.

넌 알지 못했니 너무나도 자주였던 걸 말이야.

그 모든 순간들은 결코 우연들이 아니었어.


나의 '쟤'는 분식점에서 마주쳤던 한 학년 위의 오빠였다. 나란히 있던 교문 아래로 서점과 문구점, 분식점도 나란히 붙어 있었는데 친구들과 자주 갔던 곳은 당연히 분식점이었다. 여자애들이 주로 가는 곳이라 남자애들은 자주 오지 않았는데 그날따라 나의 '쟤'가 왔었고 마지막 떡볶이를 쓸어 담고 있었다.

"어? 우리 건데?" 옆에서 친구가 외쳤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건 아니었다. 우리가 주문하려고 했었던, 그러나 아직 주문하지 못하여 그저 눈앞에서 빼앗기기 직전의 것으로, 우리가 늘 이 시간에 오는 단골이니 한 발만 더 빨랐더라도 우리 건데? 정도의 말들이 생략되어 '우리 거'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그 오빠가 이 상황까진 알지 못했겠지만 여고생들에게 떡볶이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았던 것 같다. 우리 건데?라고 했던 친구에게 아, 너네 거야? 라며 떡볶이 접시를 내주었다. 알고 보니 "우리 건데?"라고 했던 친구와 같은 독서실을 다니는 동네 오빠였다. 서로 아는 사이라 떡볶이를 두고 다투기는 애매하여 양보했던 것이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친구에게 그 떡볶이 오빠는 누구냐고 물었다. 혹시 너 그 오빠 좋아해?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주인공은 되고 싶지 않아 제일 먼저 그것부터 확인했다. 친구가 절대 아니라고 맹세했고 나는 안심했다. 그날 저녁부터 나의 '쟤'는 그 떡볶이 오빠였다. 사실, 나의 '쟤'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의 나는 여전히 기억 속에 있다.

등교하기 전엔 교복치마를 한단 더 접었다. 교문을 지나칠 때마다 나의 '쟤'가 있는지 꼼꼼히 살폈다. 소용없어, 그 오빠 아침 일찍 봉고 타고 다녀,라고 친구가 알려줬지만 그래도 습관처럼 늘 살폈다. 교복 셔츠에 떡볶이 양념이 묻어도 그저 까르르 거리며 웃기에 바빴던 나였지만 나의 '쟤'를 의식하기 시작한 후부터 떡볶이 양념을 묻히지 않고 먹기 위해 애를 썼다.


우리 교실에선 그 학교의 운동장이 잘 보였는데 가끔씩 남학생들이 웃통을 벗은 채 운동장을 돌곤 했다. 아마도 벌을 서는 거 같았는데 "야, 또 운동장 돌아."라고 누군가가 외치면 우리 모두 창문에 매달려 웃통을 벗고 운동장을 돌고 있는 애들 중에 각자의 '쟤'가 있는지 살피느라 바빴다.

"창문에 서 있던 놈 다 나와!"

"또 너야?"

운이 나쁜 날이면 복도를 지나가던 선생님께 들켜 교실 밖에 일렬로 서서 벌을 서기도 했다. 한 번만 더 창문에 서서 쳐다보면 너네도 똑같이 그 운동장에서 뛰게 한다,라고 했을 때 어느 친구가 눈치도 없이 "와아~!" 하고 신나 하는 바람에 벌을 서는 시간만 더 늘어나기도 했다.


가끔씩 수업이 끝난 후의 청소시간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기억 속의 청소 시간은 언제나 늘 여름이다. 교실 뒤로 책상을 모두 밀어붙였다. 각자의 청소 도구를 손에 쥐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청소 따윈 할 생각 없이 그저 마주 보고 떠들며 웃기만 했다. 열린 창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하얀 커튼이 휘날렸다. 그런 날 방송 반에서 자주 틀어주었던 노래는 듀스의 '여름 안에서'였다. 우리는 밀대 걸레를 손에 쥐고 듀스의 춤을 따라 추다가 서로의 춤사위를 비웃으며 깔깔거리곤 했다. 들리던 대로 가사를 따라 부르던 시절이라 '그래, 너는 푸른 바다야.' 이 부분을 '그래, 너의 꿈은 화가야.'라고 불러버려 불렀던 아이와 듣고 있던 아이들 모두 정신 나간 애들처럼 깔깔거렸다. 그러다 화가 난 선생님께 걸려 혼이 나면서도 '화가래. 화가~ 미쳤나봐~'하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 하던 때였다.


떡볶이 오빠가 옆 학교 언니랑 사귄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자율학습 시간 내내 울었다. 친구들은 훌쩍거리는 나를 보면서 어쩌면 우리도 각자의 '쟤'와 잘 안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함께 침울해했지만, 다음날 또 '여름 안에서'가 청소시간에 울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었다. 그 노래의 도입부에서부터 점점 고조되는 감정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밀대걸레를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오후 햇살 사이로 교실 바닥의 뿌연 먼지가 반짝였고 하얀 커튼은 언제나처럼 바람에 휘날렸다. 달뜬 마음의 이유를 알기엔 아직 어렸기에 그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자주 설레었고 많이 즐거웠으며 자주 토라졌던 만큼 많이 끌어안았고 이유 없이 웃다가 다시 또 이유 없이 울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가끔씩 그 시절의 내가 그립다.

허벅지 사이로 치맛자락이 감겼고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기 시작하면 어설픈 동작으로 그 춤을 따라 추면서 여름과 화가는 무슨 관계야? 했었다. 화가든, 바다든, 그게 무어든, 눈을 감으면 귓가엔 청량한 파도 소리가 들렸고 푸른 바다가 그려졌다. 하얀 햇살이 눈부셨던 뜨거운 여름 안이었다.

온전한 여름 그 자체였다.

투명하게 푸르렀고 한없이 싱그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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