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아라빌리 Mar 17. 2023

새벽에 젤리를 먹다가

시시한 게으름

잠들기 전에 시간을 확인했을 때 오후 10시였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소리에 잠이 깨었을 때의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전 0시 10분 정도.

보통 바로 잠들기 때문에 2시간가량 잠들었다가 깬 거다. 남편이 코 고는 소리와 아이가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저 소리 때문에 깼구나, 싶었다.

남편이 코를 고는 일은 잘 없기 때문에 오늘 하루가 유난히 피곤했다거나 내가 잠든 후에 혼자 맥주를 마셨을 터였다. 아이가 이를 이렇게 심하게 가는지는 몰랐기 때문에 이갈이용 마우스피스를 잠시 떠올리다가 다시 잠을 청했다.


출퇴근을 위해 왕복 60킬로를 달리고 있는 요즘이다. 운전 쓰레기(진짜다!! 나는 '초보'라는 말도 아까운 실력이다.)인 내가 느닷없이 하루 2시간씩 대형 트럭들 사이를 운전하는 것은 꽤나 고단한 일이며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내일 출근을 위해 다시 눈을 감았지만 코 고는 소리와 이 가는 소리에 다시 잠들기가 쉽지 않았다.  


2시간을 넘게 뒤척이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글을 쓰며 커피를 볶는 작가님의 스토어에서 주문한 원두가 어제 배송되어 와서 커피를 내렸다. 원두 포장부터가 정갈해서인지 커피 맛도 글 쓰는 사람의 커피 같았다. 사실 커피 맛은 잘 모르는데 남편이 마셔보더니 괜찮은 원두라고 했다.

이제 이렇게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가 아침에 커피 한잔을  진하게 내려 텀블러에 담고 출근할 계획이다. 커피를 마시다 보니 어제 샀던 젤리가 먹고 싶어서 젤리를 꺼내 먹었다. 과연 젤리는 어디에나  어울리는 음식이다.


요즘 많이 게을러졌다. 몇 년간 보통 6시간 정도씩만 잤는데 요즘은 8~10시간 정도 잔다. 주말엔 훨씬 더 많이 잔다. 그리고 출퇴근 외엔 대체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삶을 위해 필요한 아주 최소한의 것만 하고 있는 것 같다. 읽지 않은 카톡이 100개쯤 쌓이자 더욱더 읽기가 싫어져 300개가 넘을 때까지 읽지 않았더니 어제 결국 전화가 왔다. 왜 카톡을 보지 않냐, 하길래 '아, 앞으로 꼭 읽음 표시로 해놔야지.' 다짐했다. 해야 할 일에 '카톡 읽기'를 하나 더 추가했다.

이런 식으로 기록해 둔 '해야 할 일'의 목록은 늘어나고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스스로의 게으름이 맘에 걸렸는지, 며칠 전에 보았던 들꽃과 봄 햇살을 핑계되며 '아무것도 하기 싫은 땐 그저 봄햇살에 고여있던 들꽃처럼 나도 잠시 멈춘 채 풍경이 되어 고여 있자, 지금은 봄이니까.'라고 생각했는데 더 이상 봄 핑계를 대기도 머쓱하다.

내가 게으른 이유가 왜 봄 탓인 걸까.

차리리 "봄이 그렇게도 좋냐, 멍청이들아" 하던 10센티들처럼 봄한테 시큰둥하기라도 할 것이지, 괜스레 봄 타는 척 핑계되며 게으름을 부리고 있다.


시간이 생기면, 퇴근 시간이 빨라지면, 주말에 출근을 하지 않게 되면, 나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리스트에 적어 놓았던 일들이 많았다.

하루에 1시간씩 꼬박꼬박 독서를 하고, 꼭 소설을 한편 써야지, 결심했었다. 브런치의 글도 지금처럼 이런 글 말고 좀 더 정갈하고 간결한 글. 유리병에 든 보리차 같은 글을 써야지, 생각했는데 여전히 쓰던 습관대로 그저 손 가는 대로 쓰고 있어서 내가 쓴 글을 다시 보기가 싫다.  

일주일에 3번 요가를 하고, 런데이 챌린지를 다시 시작하고, 바이올린을 배우고, 스콘과 치아바타를 직접 구워 먹고, 주방의 기름 떼를 다 닦아내어 대청소를 하고, 팬트리가 없는 집이지만 어떻게든 비워내고 정리하며 자그마한 팬트리를 꾸며야지.

그런 것들을 결심했는데 하나도 제대로 되지 않으니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

가만히 젤리나 먹으며 집안 어딘가에 고여 있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리길 한 달 정도 했더니 몸무게만 늘었고 어딘지 모르게 조금 무기력해진 느낌이다.


그러는 동안 오렌지레몬나무엔 꽃이 피어서 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향이 꽤나 깊고 진하다. 그렇다면, 이제 좀 움직여볼까. 슬슬 그런 생각이 든다. 이걸 '쉼'이라고 생각하면 될 일인데 나는 그렇게까지 느긋한 사람은 아니라서 이쯤 되니 마음이 초조하다. 몸무게가 늘어난 것을 확인하니 내 게으름에 대한 수치가 좀 더 분명해진 느낌이다.


주말엔 강가를 달려볼까. 몇 년간 벼르고만 있던 안나 카레니나를 읽을까. 옷방을 다 뒤집어서 옷장 정리를 할까. 뭐부터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지금 당장 젤리 먹기를 멈추고 요가 매트를 펴자, 했다.


일단 오늘은 또 이 모양이지만, 언젠가는 유리병에 든 보리차 같이 정갈하고 단정한 글을 쓰고 말 테다, 결심하며 요가매트부터 펼쳐본다.


+ 아, 근데 어쩌면 다시 자러 갈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된다면 왠지 이 게으름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듯한데... 왜 이제 와서 졸리지...(시무룩)

매거진의 이전글 골목길 산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