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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Mar 18. 2023

보리차 같은 글

내가 쓰고 싶은 글

보리차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 일이다.

맞벌이를 하는 우리 부부를 위해 엄마가 아침 일찍 우리 집에 왔다가 저녁까지 머무르며 육아와 살림을 도와주셨다.

아들이 3학년이 되면서, 이제 애도 제법 컸기에 학교를 마치고 학원과 태권도를 돌리면 우리의 퇴근시간과 맞아질 듯하여 더 이상 엄마가 오지 않게 되었다. 육아도, 살림도. 이제 온전히 남편과 나의 몫이 된 것이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도 두 가지 일 모두 워낙 못 해서 조금 긴장이 되긴 했다.

아들은 내가 만든 음식을 가장 맛없어하는데, 사실 내가 먹어도 내가 만든 음식이 딱히 맛있진 않으니(남편과 엄마, 나. 셋 중에선 일단 내가 꼴찌다.) 맛으로 무시하는 말에 크게 기분 나빠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어쩔티비" 라고 맞서버려야지, 하며 어깨를 으쓱거리는 연습을 하기도 하는데 실전에선 생각만큼 쿨하게 대응하기가 어렵다.

"이거 엄마가 만든 거야?"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의 출처부터 확인하는 아들이 얄밉다.

"응. 엄마가."

나의 대답에 대놓고 실망하는 표정을 보면 한 대 쥐어박고 싶다. 어째서 저런 건 자기 아빠를 꼭 빼닮았을까.  '그래봤자 넌 이거 먹어야 해.'라는 쿨함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어쩔티비" 라고 하고 싶은데 대체로 실패한다.


보리차는 할머니 보리차가 최고인데...라고 아쉬워하는 아들한테 요리는 할머니나 아빠만큼 못 해도 보리차정도는 할머니보다 잘 끓일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보리차쯤이야. 물에 보리를 한 움큼 넣고 끓이면 되는 거잖아?! 이걸 누가 못 해. 생각했다.

근데 그 쉬운 보리차로도 번번이 아들한테 지적당하고 있는 요즘이다.

엄마 보리차는 싱거워.

엄마 보리차는 아무 맛도 안 나.

엄마! 보리차에 뭐 넣었어? 왜 이렇게 써?

꿀밤을 넣었다, 이 자식아!라고 쏘아붙이며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10살짜리한테 흔들릴 순 없지 싶어 간신히 참는다. 나의 인내를 눈치챘는지 맹물 같은데 맹물도 아니고 보리차도 아니야,라고 끝내 한마디 더 한다. 이 자식이 진짜......


도대체 우리 엄마는 보리차를 끓일 때 뭘 넣는 걸까.  

대단한 요리를 해내고 싶은 맘도 없다. 그저 보리차라도 좀 잘 끓이고 싶은데. 내 보리차와 엄마 보리차는 뭐가 어떻게 다른 걸까. 엄마의 보리차를 궁금해하면서 지난번에 한 움큼 넣고 끓여봤으니 오늘은 조금 덜 넣고 끓여보기로 한다. 아들말대로 또 싱거우면 내일은 조금 더 넣어볼 생각이다.

쳇!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보리차라니. 자존심이 제법 구겨진다.


주전자의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보리차 생각에 빠진다. 플라스틱 물통 말고 유리병에 넣어야지. 오리 모양의 유리병에 넣을까. 아니다, 보리차는 그저 단정한 디자인의 정갈한 유리병이 어울리지. 너무 멋을 부려도 보리차 같지가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엄마는 썬키스트 오렌지 주스 병에 보리차와 결명자를 섞어서 끓인 물을 담아놓았는데 결명자 맛 때문에 그 물은 진짜 별로였다. 그 결명자를 섞은 것도 아닌데 어째서 아들놈은 내가 만든 건 보리차조차 별로라는 걸까.


주둥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김 사이로 이 생각 저 생각이 둥둥 떠다닌다. 달아오른 주둥이 끝에서 점점 뜨거운 김들이 쏟아져 나와 이마가 뜨거워지는 느낌이다. 슈욱슈욱.


문득 보리차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런치를 시작하면서 깨달은 것은 두 가지다. 내가 생각보다 글 쓰기를 많이 좋아한다는 것과 안타깝게도 쓰기에 대한 내 마음만큼의 글을 써내진 못 하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대단한 글을 쓰진 못 하겠구나 생각했지만 꼭, 뭐... 멋지고 대단한 글을 쓸 필요 있나? 그런 건 그냥 잘 쓰는 다른 사람이 쓰라고 하고 나는 우리 아들이 매일매일 찾는 보리차 같은 글을 쓰면 되는 거 아닌 가 싶은데, 그 보리차도 이리 어려워서야. 이건 조금 좌절이다.  


쇼핑사이트에서 보리차를 검색해 본다. 후기가 꽤나 많이 달린 보리차를 살펴보니 레시피도 있는  같다. 계량스푼이 함께 들어 있어 스텐차망과 같이 주문했다. 리뷰가 3 개나 넘게 달린 제품이니 똥손인 나도 이번엔 성공하려나.

곧 날이 조금씩 더워질 테니 작은 주전자에 매일매일 보리차를 끓여낼까 한다. 보리차를 끓이는 동안 하얀 김 사이로 슈욱슈욱 떠다니는 찰나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라치면 어느 날은 운이 좋아 나와 눈이 마주치는 이야기들도 있을 테지. 투명하고 구수한 보리차를 그저 덤덤한 온도로 단정하게 담아낸 유리병처럼 나도 그 순간을 그리 담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보리차를 끓이는 하루하루가 무던하게 흘러가다가, 어느 날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냉장고 문을 열고 유리병 안에 든 보리차를 마시며 "역시 보리차는 엄마 보리차가 최고지!"라고 말해준다면 흐뭇한 미소가 잠시 너울거리며 보리차 위로 찰랑거릴 지도 모른다. 그런 순간을 상상하니 기분이 금세 좋아진다.

주문한 보리차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얼른 보리차를 끓이고 싶다.   

하얀 김사이로 슈욱슈욱. 마음이 굽이치며 보글보글 끓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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