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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Apr 03. 2023

부부의 세계

어쩌면 영원한 밸런스 게임  

최근 남편과 조금 소원했었다.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후 햇살 속에 부유하고 있는 먼지 조각처럼 서로의 하루 속에 온전히 닿지 않은 채 스치듯 머물고 있었다. 사실 이런 느낌은 나만의 일방적인 거리감일 뿐이며 남편은 아예 인지하지 못하거나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그러한 종류의 무관심이 '소원해졌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여러 가지 현상과 감정 속에 우선순위로 포함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묘한 서먹함과 무신경함까지 그 범위에 넣으려 하니 조금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어쨌든 남편의 하루가 내게는 닿지 않고 있었고, 나의 하루 또한 남편의 어깨 위를 스치며 둥둥 떠다니고만 있었다.


부부끼리도 짝사랑이 있는가. (나의 짝사랑으로 시작된 관계의 태생적 한계인가)

우리 집만 이런가. (설마)

남의 집 풍경도 다르진 않겠지. (아무렴)


방문을 닫고 요가 매트를 깔고 혼자 있는 시간을 누리고자 하지만 남편이 나를 '혼자만' 내버려 둘까 봐 요가 매트 위에서도 집중하지 못했다. 한 달 전부터 콰트 프로그램의 '은아의 지친 몸과 마음 치유' 커리큘럼 중 원숭이 자세(다리 찢기)를 수련 중이었지만 문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다리 찢기엔 진척이 없었다. 내가 애매하게 공중에 뜬 하반신으로 애매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남편은 오롯이 저 혼자서 더 글로리 시즌 1,2를 정주행 했고 최근 구입한 슬램덩크까지 완독 했다.


내 다리 찢기의 각도엔 변함이 없는데 남편은 한결 여유롭고 가뿐한 얼굴이었다. 그 표정을 향한 내 감정의 정체는 틀림없이 서운함인데 그 서운함에 대한 그럴듯한 이유가 없었다.

남편의 입장에선 나야말로 요가를 한답시고 문을 닫고 들어간 사람일 테다. 남편은 닫힌 방문을 보다가 더글로리와 슬램덩크 독파를 시작한 것이다. 먼저 문을 닫고 요가 커리큘럼의 강의를 재생시킨 사람은 난데 나는 왜 내가 꿰기 시작한 구슬에 난데없이 서운한 걸까.


그러다 문득, 어쩌면 나는 꿰어진 구슬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구슬의 그러한 이어짐에 화가 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남편도 나만큼이나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긴다는 것이, 도리어 나보다도 썩 잘 즐기고 있다는 것이, 나를 싹 잊고 혼자 내버려 뒀다는 것이 조금 서운했던 것이다. 고작 이런 일로 서운하지 않으면 참 좋겠지만 여전히 이까짓 일로 꽤나 약이 오르는 걸 보니 내 짝사랑은 아직도 진행형인가 싶었다.


연초에 방영한 설특집 파일럿 예능으로 '미쓰와이프'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유명인의 아내들이 나와서 남편과 관련된 퀴즈를 맞히고 밸런스 게임을 했었다. 내가 봤던 부분의 주제는 '남편보다 10년 더 살기 VS 10년 덜 살기'였는데 출연진 중에 누군가가 남편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가 없다며 불쑥 울음을 터트렸고 보던 나도 그만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엉엉엉. 따라 울면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역시 나의 결론은 남편보다 10  살기였다. 남편은 내가 없는 삶을 버텨내지 못할  같았다. 남편은 나보다 외로움이 많고 자신을 챙기는 일에 능숙하지 않다. 내가 없으면 너무 슬퍼하다가 폐인 비슷한 것이 되어 잔뜩 흐트러진 몰골로 주변의 짐이  것이 뻔하였다. 그런 남편을 생각하니 마음이 몹시 아파서 차라리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남은 생을 정리한  따라가야지 했었다. 그런데 이것도 다시 생각해  문제다. 남편이 없는 삶을 내가 과연 버텨낼  있을까. 그런 생각은 그저 생각  자체만으로도 너무 무섭고 막막하다.


아, 다리 찢기가 왜 잘 되지 않을까에서 시작된 생각이 너무 많이 가고 있다. 도통 진도가 나가지 않는 건 다리 찢기인데 왜 느닷없이 남편을 보내버리고 있을까.


남편은 더글로리와 슬램덩크 독파를 끝낸 후 다시 유튜브를 보기 시작했다. 어제는 쉬스킨의 라캄파넬라 연주에 푹 빠져서 피아노 연주 영상만 보는 것 같았다.

꿰기 시작한 구슬의 매듭을 짓는 심정으로 요가하러 들어온 방의 문을 닫지 않았다.

남편이 이런 고차원적인 균형과 종이 한 장 차이로 뒤틀리는 오묘한 감정의 균열을 이해할 리가 없지. 이건 더 사랑한다기보단 감정적으로 더 우월한 것이지. 이런, 이런...... 하아, 결국 우리 집 고등동물 서열에선 단연코 내가 1위인 건가. 이렇듯 요가 수련 전에 정신승리부터 이뤄내 본다.


다리 찢기 하는 꼬락서니(최대한 정제된 표현을 쓴다 해도 이 정도가 최선일 수밖에 없는, 아주 숭악한 몸짓이다)를 남편한테 보여주기 VS 방문 꼭 닫고 온종일 내내 혼자 있기

남편보다 10년 더 살기 VS 10년 덜 살기

내가 더 사랑하기 VS 외로울 남편 걱정하기


부부의 세계란 어쩌면 영원한 밸런스 게임일지도 모른다.


# 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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