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나의 집
신혼집은 1988년도에 지어진 임대 아파트였다.
엄마는 좀 있는 집으로 시집갈 것이지 어째서 우리 집보다 더 없는 집으로 가느냐 했지만, 남편도 같은 말을 들었을 것이 뻔했기에 못 들은 척했다. 형편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상대와 결혼하길 바랐던 양가 부모님의 기대를 가볍게 져버리고 딱 고만고만한 수준끼리 만난 우리는, 단칸방도 아니고 방이 두 개나 있는 아파트에서 신혼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뻐서 그저 이 집이 참 좋았다.
집수리를 따로 맡길 돈 같은 건 없었기에 도배장판만 업체한테 맡기고 남편과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죄다 우리 손으로 뜯어고쳤다. 당시 셀프 인테리어가 유행하던 중이라 여기저기 정보가 넘쳐났다. 문고리닷컴 같은 사이트를 뻔질나게 드나들며 페인트와 타일, 메꾸미 같은 것들을 사들였고 퇴근 후엔 저 집으로 가서 문과 오래된 시트지와 타일 등을 뜯어내었다. 이것저것 직접 시공하다 실패하면 '네 탓이네, 내 탓이네'를 반복하며 남편과 다투기도 많이 다퉜지만 어쨌든 집수리에서만큼은 꽤나 호흡이 잘 맞았다.
몇 겹의 세월이 덧칠되어 있어 당초의 색을 도무지 알 수 없었던 문과 그저 암흑 그 자체였던 몰딩은 몇 번이고 반복하여 하얀 페인트를 칠해주었다.
몰딩에 페인트를 칠하는 일은 생각보다 꽤나 어려웠다. 사다리에 올라가 고개를 젖힌 채 페인트를 칠하다 보면 목과 어깨가 너무 아파 자주 쉬어줘야 했다. 서로의 얼굴과 머리카락에 묻어 있던 페인트를 보면서 깔깔거리다 보면 어느새 밤이었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에 천지창조를 그리던 미켈란젤로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걱정할 일은 태산 같았지만 아주 오래전 미켈란젤로의 고단함이나 걱정하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14층이라 하늘이 가까워 좋았다. 이 달빛과 별빛만큼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행복해하였다.
주방의 기름 떼를 하나하나 긁어내고 오래된 시트지를 뜯어내어 직접 타일을 시공했던 것은 내가 두고두고 여기저기에 자랑했던 일이다. 성격 상 집에 사람이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저 타일만큼은 자랑하고 싶어 집에 누가 오기라도 하면 '이거 내가 한 거야' 라며 꼬박꼬박 자랑하곤 했다. 자세히 보면 타일 줄이 맞지 않아 삐뚤삐뚤 어설픈 부분이 많았지만 하얀 타일에 얼룩이라도 생길까 봐 부지런히 닦으며 가꾸었던 나의 작은 주방이었다.
남들은 처음이자 마지막 호사를 누린답시고 이것저것 신부관리를 하는 동안 나는 늘 목장갑을 낀 채로 집을 뜯어고치며 터프한 결혼준비를 하던 날들이었다.
거실은 너무 좁아 식탁과 소파를 놓을 곳이 없었다. 가구를 들여봤지만 가뜩이나 좁은 공간을 꽉 채우고 말아 사람이 있을 곳이 없었다. 최소한의 가구 외엔 들이지 말기로 결심하고 구입했던 식탁은 반품했다.
수납공간이 허용하는 만큼의 짐만 가지고 신혼생활을 했다.
남편과 나는 이제 막 입사한 신규였고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둘의 월급을 모아봤자 1인분의 몫이었기에 가진 것은 늘 부족했고 카드값의 매몰찬 쫓김을 당하던 날들이었지만, 정남향으로 난 그 작은 아파트 안으로 낮이면 햇살이 소복하게 쏟아졌고 밤이면 달빛이 소담하게 흘러들어 우리를 채워주었다.
하찮고 어설펐지만 귀여운 하루하루들이 도란도란 이어지고 있었다.
집 근처 마트에서 식재료를 배송시켰을 때 배달해 주신 아저씨가 현관에 박스를 내려놓더니 이 단지에서 우리 집이 제일 이쁘다며 칭찬을 해주셨다. 그 아저씨를 붙잡고 이 주방 타일 제가 다 붙였어요, 쩌렁쩌렁 자랑했던 그날의 내가 아직도 많이 사랑스럽다.
어느 날.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상사가 경매로 나온 그 아파트를 투자 목적으로 구매할까 싶어 보러 갔다가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런 곳에 사람이 살 수 있느냐, 임대 아파트 거기 못 쓰겠으니 얼른 나오라며 너무 큰 목소리로 내 걱정을 해주어 나도 모르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아니, 우리 집은 괜찮은데요. 제가 다 고쳤는데요.
쥐꼬리만 한 목소리로 우쭐쭈물 대답했지만 오후 내내 사무실 사람들은 내 걱정을 해줬다.
부모님이 안 도와주셨나 보네, 원래 신혼 때는 그런 데서 살기도 한다, 눈 딱 감고 거기서 2년만 살다 돈 모아서 나와라.
그곳에서 '눈 딱 감고' 살아야 했던 순간이 내게는 없었다. 하나하나 내 손이 닿아 있는 그 집을 매일 같이 마주하며 틈만 나면 살뜰히 만지면서 살고 있었기에 나는 정말로 괜찮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괜찮다는 말을 하기가 조금 부끄러웠던 날이었다.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선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간신히 참았던 기억이 난다.
그 집에선 아들이 4살 때까지 살다가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왔다.
지금 집으로 이사하면서 식탁과 소파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날 많이 기뻐하는 나를 보면서 어쩌면 그 집에서 조금 괜찮지 않았던 날도 있었구나,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래도, 대체로 아주 괜찮은 날들이었다.
아들은 그 집을 '작은 거 우리집'이라 부르며 그 거실에 쏟아져내렸던 햇살을 따뜻하게 기억하고 있다. 포근하고 안락했던 그곳을 많이 그리워한다.
나 또한 14층에서의 삶을 종종 떠올린다. 가진 것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적어도 이것만큼은 공짜니까, 하며 작은 거실로 쏟아지던 햇살을 온전히 누렸던 시간들과 이불을 감고 잠든 남편을 깨우다가 여전히 잠에서 깨지 못하는 모습조차 귀여워했던 나를 기억해 낸다. 맞아! 그런 우리가 있었지, 하며 자그마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물질이든, 마음이든, 그게 무어든. 어떠한 종류의 가난이든. 그 실질적인 가난 앞에서 온전히 가난해지지 않기란 너무 힘들지만 언제나 조금은 당당해지려고 한다. 지나치게 낯을 붉히지 않기 위해, 살짝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많이 비굴해 보이진 않기 위해, 내가 가진 것들을 진심을 다해 아끼며 기꺼이 기뻐하려 한다. 이걸 가지기 위해 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손에 쥐었을 때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를 잊지 않기 위해 자주 뒤를 돌아보며 호흡을 늦춘다.
그러면 진짜로 조금은 괜찮아진다. 아주 썩 괜찮아진다.
지금 작은거 우리집엔 누가 살고 있을까. 내가 붙였던 주방 타일의 기름 떼는 누가 닦아내고 있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마음이 작게 일렁인다. 이 일렁임이 슬픔인지, 그리움인지. 아직도 이 마음의 정체를 잘 모르겠지만 그 집에서 울리는 아기자기한 대화와 자그마한 일상의 행복을 가만히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