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 저녁에 거짓말처럼 세탁기가 고장 났다.
요즘 들어 세탁기가 돌아갈 때마다 부쩍 우에에엥 거리긴 했다. 언젠가, 내일 당장 세탁기가 돌아가지 않으면 어쩌지? 걱정하는 글을 썼었다. 세탁기가 돌아가듯 우당탕탕 거리는 하루들이지만 내일 당장 세탁기가 멈춰버리면 큰일인 것처럼 그런 요란한 하루들이라도 차곡차곡 무탈하게 잘 쌓였으면 좋겠다고, 그리 썼던 거 같다.
그런데 세탁기가 고장 나 버리다니. 전원만 들어올 뿐 아무것도 작동되지 않았다.
왜 이러지? 순간 숨이 턱! 멈췄다. 나는 이런 갑작스러운 순간에 침착함을 유지하기 힘든 사람이다. 사소하게 틀어지는 일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며 불안해하는 편이다. 해결책이 빨리 찾아지지 않으면 그 불안은 금세 몸집을 부풀리고 만다.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했더니 일주일 후에나 기사 방문이 가능하다고 했다.
인터넷 검색을 해봤더니 아무래도 세탁기의 메인보드가 나가버린 것 같았는데 일주일 후에 기사가 방문한다 해도 진단을 내린 후 부품을 구하느라 시간이 또 지체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매일 같이 빨아야 하는 수건이랑 아이의 태권도 도복은 어쩌지?
다음 주에 온다는 데 어쩌지?
남편은 세탁기가 고장 난 것보단 나의 좁아진 미간과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는 '어쩌지'의 앞에 더 큰 고단함을 느끼는 얼굴이었다. 큰 동요가 일기 전에 어떻게든 빨리 진화시켜야겠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결의에 찬 표정으로 드라이버를 들고선 세탁기 뚜껑 따위를 열기 시작했다.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들여다보며(대체 뭘 봤던 걸까?) 말했다.
"꼭 서비스센터가 아니라도 괜찮아. 그냥 세탁기 수리점 검색해 보면 많을 거야. 메인보드 고장은 부품만 교체하면 되는 거야."
남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근처의 세탁기 수리업체를 검색하여 전화를 걸었다. 고장상태를 설명하고 있으려니 남편이 전화를 가져가 기사님과 통화를 하며 모델명을 알려주었다. 금요일 오후쯤은 되어야 부품을 구할 수 있을 거라 해서 그날 수리하기로 했다.
수건과 아이의 도복은 남편이 욕실로 가져가 빨기 시작했다. 김장이나 손빨래 따위를 하는 일이 없으니 집에 커다란 대야도 없어 작은 세숫대야 두 개를 번갈아 사용하며 빨래를 하고 있었다. 끙끙거리며 빨고 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 안쓰러웠다. 어떠한 종류의 호들갑이라도 나한테서 뭔가가 발현되기 전에 이 상황을 마무리하고 싶은 강한 의지가 보여서 조금 미안해졌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주면서 "이제 널면 돼" 하길래 내가 조용히 비틀어 짠 후 탈탈 털어서 널었다.
하필 미세먼지가 심할 때 세탁기가 고장 날 게 뭐람. 창도 못 여는데. 투덜거렸지만 사실 남편이 아무 일도 아닌 듯 행동해 줘서 깊이 안도하고 있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고치지 못할지언정 드라이버를 꺼내 들고 세탁기 안을 들여다 봐줘 꽤나 든든했다. 너 없으면 내가 어찌 살까, 하는 감정들은 꼭 이렇게 소소한 순간에 조금 시시한 얼굴로 밀려든다. 좀 더 그럴 듯한 순간에 살짝 극적인 표정으로 찾아올 것이지.
일상이 자그마한 사건 사고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데 나같이 사소한 일에도 매번 동요되는 사람은 쉽게 그 감정에 휩쓸려 이리저리 흔들린다. 개업하는 가게 앞에 놓인 풍선인형이라도 된 듯 몸과 마음이 울렁거린다. 아침마다 "무탈한 하루. 나마스떼."라고 중얼거려 본들 어느 날은 세탁기가 고장 나고 어느 날은 차가 멈춰버리는데(그날도 호들갑이 만렙이었다) 그럴 때마다 매번 그렇게 흔들리기엔 '어른'이라는 범주에 진작에 들어가버린 내 나이가 조금 머쓱하다. 이렇게 하찮은데 벌써 어른이라니.
이 나이쯤 되었으니 이제 이 정도쯤은 버텨낼 수 있는 근육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수건을 비틀어 짜내었듯 그 정도쯤은 그냥 가볍게 비틀어 짜내고 탈탈 털어낼 수 있는 근육이 어쩌면 내게도 숨어 있으려나. 숨은 근육 찾기를 하듯 오늘 저녁엔 내가 빨래를 해볼까 한다. 혹시 아나. 남편도 그런 나를 보면서 속으로 몰래 든든해하며 '너 없으면 내가 어찌 살까' 혼자 조용히 안도하고 있을지. 음, 아무렴. (끄덕끄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