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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온 우연을 즐기는 건 내 몫

2023 부다페스트 벨바로시 와인 & 샴페인 축제

by 바다건너는 바다

나는 관광객보다는 여행자가 되고 싶단 말을 종종 해왔다. 숙제하듯 명소들을 둘러보고 그 증거를 남기기 위해 사진 찍는 것보다는 마치 이곳에 사는 사람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그 문화와 사람들 속에 흡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해왔던 말이었다.


그리고 그 기회가 부다페스트 여행에서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이른 아침 호텔 근처를 산책하다가 공원에 늘어선 푸드트럭을 발견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열지 않았지만 한눈에 보아도 야시장이나 축제를 위해 준비된 것 같았다. 부다페스트 근교여행 일정이 있어서 기차를 타고 에스테르곰과 센텐드레를 다녀온 우리는 출출했지만 식당을 찾아보는 대신 아침에 보았던 푸드트럭의 정체를 확인하고자 그 공원으로 다시 갔다.


공원에 들어서기 전부터 그곳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통해 와인축제가 열린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한 손에 와인잔을 들고 나오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와인은 우리가 좋아하는 술 중에 하나였고 평소에도 즐겨마셨기 때문에 굉장히 설렌 마음으로 공원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공원 앞에 놓인 안내판은 본 순간 나는 한껏 들떠있는 남편과는 다르게 불안감이 엄습했다. Cashless, Pre-loaded HelloPay, 그리고 무엇보다 당황스러운 것은 festival glass였다. 정리해 보자면 이랬다. 축제를 위해 준비된 와인잔을 구매한 후 각 부스를 돌아다니면서 와인을 주문해서 마실 수 있다는 것. 와인잔은 작은 잔과 큰 잔 두 가지가 준비되어 있었고, 그 와인잔을 구매할 때도 푸드트럭에서 음식이나 와인을 주문할 때도 현금은 받지 않는다는 것. 스마트폰으로 주문을 하거나 헬로페이라는 충전식 카드를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우선 와인잔을 구매하는 것부터 망설여졌다. 이틀뒤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구매한 와인잔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한국으로 가져간다면 기내로 들고 가야 할까, 가방에 넣어야 할까? 가방에 넣는다고 해도 한국까지 정상적인 상태로 가져갈 수는 있을까?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옆으로 쓰러지기만 해도 깨지는 얇은 유리잔을 어떻게 수하물로 부친단 말인가. 그리고 나에겐 결제에 필요한 충전식 카드도 스마트폰 어플도 없었다. 오직 기대할 수 있는 건 와이파이와 비슷한 그림이 그려진 비접촉카드였다.


나는 남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우리 그냥 식당 가서 밥 먹을까? 여기 너무 덥고 불편할 것 같아. 그리고 주문하는 거도 쉽지 않을 것 같고,,"

그렇지만 남편은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이미 이곳에서 어떤 음식을 주문할지 어떤 와인을 마실지 결정하고 기대하고 있는 사람한테 이런 하찮은 핑계들이 이유가 되겠는가.

"왜? 그냥 주문하면 안 돼? 결제 시도해 보고 안되면 그때 가도 되잖아."

나는 속으로 외쳤다. '아니, 바보야 나는 결제 시도도 해보고 싶지 않다고, 와인잔을 구매하는 것도 주문하고 결제하는 것도 모든 게 어려워 보인 다니까?'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이야기했다. "와인잔은 어떻게 할 건데? 저거 한국까지 가지고 갈 수 있겠어?" 그때 남편이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엔 플라스틱 잔에 담긴 맥주가 있었다. "맥주도 파는 것 같은데? 저거 주문하면 되지 않아?"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서 낯선 시스템으로 주문을 하라니. 한국이었어도 망설였을 일을 헝가리에서 하란 말인가? 하,, 그럼에도 남편을 설득하는 것보다 음식을 주문하는 게 더 쉬울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근처에 있던 안내부스에 가서 물어봤다.

"혹시 이 카드도 사용 가능할까요?"

내 카드를 확인한 직원이 아마 가능할 것 같다고 이야기해 준 덕에 용기를 내서 남편이 먹고 싶다던 햄버거를 주문하러 갔다.



주문을 받는 직원에게 고메버거 하나를 주문하니 바로 옆에 있던 직원이 조리를 시작하려고 했다. 부랴부랴 이 카드로 결제가 가능할지 모르겠다며 한 번 시도해 봐도 괜찮겠냐 물어보니 음식 준비를 중단시켰다.

'

''

단말기에서 결제가 완료됨을 알리는 소리가 나자,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에서도 진동이 느껴졌다.

성공적으로 결제가 되었다.


뭐든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지 않은가. 자신감이 붙은 나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감자튀김과 오징어튀김, 그리고 햄버거까지 손에 들고는 중앙에 있는 테이블로 자리를 잡았다. 이제 마지막 관문인 술 주문만 남았다. 와인잔은 진작 포기하고 남편이 제안한 맥주를 주문하러 갔다. 플라스틱 잔으로 제공받을 수 있냐 물어보니 가능하다며 맥주 종류를 선택하라고 했다. 와인 못지않게 맥주도 즐겨마시는 나에게는 좋아하는 스타일의 맥주를 고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맥주까지 두 잔 받아 들고 자리로 돌아오니 이제야 주위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하고 웃고 먹고 마시는 모습이 그렇게 즐거워 보일 수가 없었다. 내가 왜? 대체 뭐가 무서워서 이걸 포기하고 돌아가려고 했을까? 여행 기간에 마침 축제가 열리는 것도 기가 막힌 우연인데, 그렇게 여행자가 되고 싶다, 그들의 삶에 스며들고 싶다 이야기하던 내가 아이러니하게도 그러지 말자며 남편을 설득하려 했다는 게 부끄러워졌다.



용기를 내어 남편에게 말했다.

"여기서 먹자고 말해줘서 고마워. 나 지금 너무 행복해"

말없이 웃어주는 남편을 보고 나는 두 번째 맥주를 주문하러 갔다.


와인축제에 와서 맥주를 마시면 어떠한가. 내가 와인을 마시러 온건 아니잖아? 맥주를 마시든 와인을 마시든 물을 마시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부다페스트 사람들과 어우러져 축제를 즐기고 추억을 남기고 이렇게 그때를 되새기며 행복해하는 것. 우연은 결국 받아 들어야 내 것이 되는 거였고, 그것을 즐기는 것 또한 내 몫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음 여행지에서 또 어떤 우연과 기회가 찾아올지 모르겠지만 이번만큼은 절대 두려워 않고 즐겨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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