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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만난 이웃집 할머니

할머니 한분 한분은 다 역사책이다

by FlyBiochemist


미국살이를 처음 시작한 아파트는 좀 특이했다. 4층짜리 아파트의 북쪽과 서쪽은 시니어 하우징이고 나머지 절반은 일반인도 살 수 있는 아파트였다. 그러다 보니 시니어하우징에 입주는 하진 않지만 시니어 하우징 어르신 분들과 교류하기 위해서 & 혼자 몸으로 주택을 관리하는 건 너무 큰 일이라 일반 아파트에 월세로 사시는 어르신들이 종종 계셨다.


입주한 지 며칠 안되었을 무렵 누가 문을 두드려서 나가보니 할머니가 한분 서 계셨다. 옆집에 사는 할머니인데 음료수 뚜껑을 열 수 없어서 찾아왔다고 하셨다. 병뚜껑을 따드리자 할머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우리를 집으로 초대해 주셨다.


Elizabeth 할머니는 이름처럼 영국여왕을 닮으셨던 기품 있는 분이셨다. 할머니 할아버지들 한 분 한 분이 다 작은 역사책이라지만 할머니에게 듣는 이야기들은 하나하나가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신기한 이야기들이었다. 윔블던의 최초의 여성 스포츠 닥터였던 시절이야기. 요트를 잘못 몰아서 도착한 네덜란드 어느 마을에서 마침 열렸던 전통옷을 입고하는 작은 축제에 참여했던 이야기, 그리고 가장 영국스러운 날씨를 찾아온 미국 북서부 이야기를 해주시곤 했다.


어느 날은 병뚜껑을 따 드리고 어느 날은 BBC라디오를 듣고 싶어 하는 할머니를 위해 인터넷 라디오 세팅. 그러면 할머니는 전 세계에서 수집한 온갖 도자기, 장식품과 앨범들을 하나하나 소개해주시면서 또 다른 이야기를 풀어주셨고 집에 올 때마다 선물로 유일한 낙이라는 Lindt의 Chilli맛 다크 초콜릿 (아마 당뇨 때문에 설탕이 없는 것만 드셔야되셔 그랬으리라)을 하나씩 선물해주시곤 했다.


(엘)리즈벳 할머니와도 이별은 찾아왔다. 첫 포닥 재계약이 불투명해지면서 일단 싼 아파트로 옮기며 안부 인사를 드렸다. 이후 텍사스로 이사를 가고, 팬더믹이 터지고 어느 정도 나아질 때쯤엔 아이가 생기고... 어느새 몇 년이 훌쩍 지났다.


지금도 Lindt의 Chilli맛 다크 초콜릿을 보면 영국 악센트로 우아하게 앉아 일을 핑계로 불러앉힌 외국인 내외에게 이런저런 옛날이야기를 해주던 엘리자베스 할머니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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